며칠전 상계동 백병원 이해정 팀장이 모교인 서울체고를 방문을 했다가 필자의 체육관에 들렀다. 이해정은 복싱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해 김성은 김동길 문성길 백현만과 더불어 독수리 5형제로 불렸던 복싱인이다. 현역에서 은퇴 후 백병원에 35년째 근무하면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해정은 서울체고 졸업반인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받은 포상금 3백만원을 결혼을 눈앞에 둔 형의 전세방 구입비로 쾌척한 미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슬하에 1남을 두었는데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현재 한 회계법인에 근무하고 있다.

이해정의 한국체대 4년 선배 정재원도 이날 동석했다. 1959년 충남 아산 출신의 정재원은 고교 시절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 출신의 엄복삼 관장의 지도로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체대에 진학했다.

이후 사업가로 성공을 거둔 그는 슬하에 2녀를 두었다. 큰 딸 제시카는 걸그룹 소녀시대 전 멤버로 팀을 떠날 때까지 메인보컬을 담당했고 배우겸 가수인 둘째 딸은 걸 그룹(fx)소속의 크리스탈이다.

이해정 백병원 팀장과 사업가 정재원 (우측)
이해정 백병원 팀장과 사업가 정재원 (우측)

지난 주말 WBA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식과 WBA J. 밴텀급 챔피언 이형철을 배출한 원진 체육관에서 트레이너 생활을 했던 김용석 사범을 취재하러 경기도 부천으로 향했다.

부천은 임진 왜란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한 의기 논개의 우국 충절을 시(詩)를 통해 노래한 수주 변영로 선생의 탄생지이다. 필자가 변영로 시인을 존경하는 이유는 김영랑 이육사 이희승 조지훈 선생과 더불어 단 한 줄도 친일의 글을 쓰지 않은 강직한 문인이기 때문이다. 

WBA 국제심판 김병무와 김용석 사범(우측)
WBA 국제심판 김병무와 김용석 사범(우측)

1957년 전북 고창 출신의 김용석 사범은 복싱 열기가 치솟던 1970년대 중반 4연승을 질주하다 부상으로 복싱을 접고 트레이너로 인생 2막을 시작한 복싱인이다. 그는 원진 체육관 김규철 관장 문하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WBC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변정일을 지도, 그가 1983년 서울 신인과 전국신인을 제패하면서 복서로 초석을 닦을 때 수훈을 세운 지도자다.

변정일은 이를 발판으로 황철순 사단에 합류해 1988년 서울올림픽(밴텀급)에 출전했다. 변정일도 필자와의 통화에서 "초창기 자신의 복싱 역사에서 조력자 역할을 담당한 사부님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용석 사범의 지도를 받은 신인시절의 변정일.
김용석 사범의 지도를 받은 신인시절의 변정일

1981년 3월 12체급 391명이 출전한 제17회 서울 신인대회에 페더급으로 출전 고명삼 (해태체)을 2회 KO승을 거두는 등 7연속 KO승 행진을 펼치면서 최우수 복서(MVP)에 선정된 최완택도 김용석 사범의 작품이다. 1964년 충남 당진 출신의 최완택 은 4월에 개최된 전국 신인대회에서도 7연승(6KO)을 거두면서 2관왕을 차지한다.

1981년 6월 프로에 전향한 최완택은 전형길 최규운 이종학 박봉춘 이경중등 톱 복서들을 차례로 잡는다. 특히 대전체고 재학시절 한정훈과 투톱을 형성, 제35회 전국선수권을 제패한 6전 전승의 이경중과 33전 26승(14KO) 7패를 기록한 최규운 (극동서부)을 각각 판정으로 잡으면서 주니어 라이트급과 라이트급 두 체급을 석권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안종권과 대결하는 최완택의 경기장면(우측)
안종권과 대결하는 최완택의 경기장면(우측)

김용석 사범은 이런 복싱 스킬을 보유한 슬러거 최완택을 1985년 9월 8일 유명우와의 일전을 앞둔 손오공의 합숙 파트너로 합류시켰는데, 이에 대해선 후회스럽다는 뉘앙스를 짙게 풍겼다.

당시 WBA J. 플라이급 도전자 결정전에서 손오공(원진체)은 유명우(동아체)와 맞붙었다. 대결을 앞두고 손오공은 충무로 위치한 호텔에서 보름간 합숙 훈련을 하면서 유명우와 결전을 준비했다. 이때 합숙 파트너가 최완택이었다.

유명우와 경기를 펼치는 손오공(우측)
유명우와 경기를 펼치는 손오공(우측)

손오공은 오후 훈련을 마치면 밤마다 홀로 나가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오곤 했고 김용석 사범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던 최완택도 손오공과 지내면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자연스럽게 술과 접촉하게 됐다. 최완택은 "당시 손오공 선배가 펀치력이 약한 유명우를 쉽고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고 폭음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 대결에서 유명우는 능수버들 같은 유연성으로 손오공의 양훅을 무력화시킨 후 샌드백 때리듯이 일방적으로 두들겼고 손오공은 7회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린다.

5연승을 기록한 곽승주를 가격하는 임종대(좌측)
5연승을 기록한 곽승주를 가격하는 임종대(좌측)

1964년 전남 보성 출신의 임종대도 김용석 사범의 지도를 받은 유망주였다. 1984년 J 페더급 신인왕전에서 4전 전승 (2KO)를 기록한 김두산 (88체)과 5전 전승을 기록한 곽승주, 4연승의 김우천등 우승 후보들을 피스톤처럼 터지는 연타로 차례로 제압하면서 대망의 MBC 신인왕전 우승컵을 들어 올린 복서가 임종대다.

이어 7연승을 기록한 표명길 마져 8회 판정으로 잡으며 '무패복서 킬러'란 닉네임을 얻는다. 1988년 3월 동양 챔피언 박찬목(현대)을 2회 칼날처럼 날카로운 연타로 2회 KO승을 거둔 안창배와 맞대결, 4회 KO승을 거두면서 유망주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김용석 사범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결정적인 순간 패배를 당하면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은 묘한 징크스가 있었다. 

손오공이 유명우에 7회 KO패하면서 복싱을 접었고 최완택도 필리핀의 로드 세퀴난과 벌인 동양 JR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체중조절 실패로 고배를 마시면서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또 한 잘 나가던 임종대도 12승 (7KO) 를 기록한 김진홍과의 라이벌전에서 팽팽한 접전을 펼치다가 10회 한차례 녹다운을 당하면서 2ㅡ1 판정에 고개를 숙인 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기울이면서 지도편달한 김 사범에게 석고대죄하고 싶은, 송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복서들이다.

원진체육관 김용석사범
원진체육관 김용석사범

김 사범은 이후 애증이 교차했던 트레이너 생활을 접고 사업가로 변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9년 경기도 모처에 7억원을 투자해 음식점을 열었지만 3개월 후 코로나라는 직격탄을 맞고 3년 후 사업을 접었다. 만루홈런을 때리려다 아쉽게 병살타를 치고 말았지만 김 사범은 재기의 시동을 걸고 사업구상에 여념이 없다. 

필자는 김 사범과 식사를 한 후 경기도 시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서 김 사범과 성동복싱 체육관에서 동문수학한 동료 복서 염철수, 주동근 두 분을 만났다. 천호동에서 대형 헬스클럽을 운영한 염철수 선배도 두 따님이 아나운서와 국민은행 여의도 본부 직원으로 근무하는 등 자식 농사를 풍성하게 수확한 자랑스런 전직 복서다.

또 한 분은 필자가 '복싱계의 일론 머스크'라 부르는 ㈜ 대동 아이텍 주동근 회장이다.  주 회장은 1958년 전북 김제 출신으로 가난 때문에 유소년기에 상경해 체육관에 기숙하면서 절차탁마의 수련과정을 거친 유망주였다.

그러나 대회를 앞두고 유니폼을 구입할 돈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출전을 포기한 비운의 복서다. 이를 전환점으로 복싱을 접은 주동근은 사즉생의 비장한 마음을 품고 산업전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1988년 3월 사업체인 ㈜ 대동 아이텍을 탄생시킨다.

대동 아이텍 주동근 회장
대동 아이텍 주동근 회장

주 회장은 사업을 시작한 뒤로 끊임없는 신기술과 신제품개발로 혁신을 거듭한 결과  ㈜ 대동 아이텍은 현재 국내 및 중국 베트남등에 주요 사업장을 두고 휴대폰 외장부품 사업에서 정밀 모형 트레인 사업에 이르기까지 다각적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며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런 공로로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여러 차례 표창을 받으면서 신념이 기적을 만드는 근원임을 재확인시켰다. 복싱인의 한사람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이다. '의지의 한국인' 주동근 회장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벌 경쟁력까지 겸비한 기업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적극적인 투자와 품질 혁신 등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복싱 백년사에서 복싱 울타리를 벗어나 가장 사업에 성공한 복서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다. 염동균 챔프의 전언에 의하면 부동산업계에 종사하는 장인의 영향으로 명동을 중심으로 부동산에 집중투자 1997년 삶을 등질 때 소유한 재산이 천억 원대였다고 한다.

주동근 회장과 김용석사범 염철수 대표(우측)
주동근 회장과 김용석사범 염철수 대표(우측)

중요한 사실은 주동근 회장의 자산보유액이 이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주변 지인들의 전언에 의하면 무에서 유를 창출한 주동근 회장은 레슬러 이왕표를 비롯한 많은 체육인에게 소리소문없이 나눔과 베품을 통해 음지에서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주 회장은 자신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복서로 전향하지 못한 아쉬움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면서 필자에게 불우한 환경에 처한 복서들이 있다면 자신에게 추천해달라는 평소의 소신을 피력했다.

누군가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 있게 사는 것이라 말했다. 돈은 죽으면 사라지지만 주변에 어려운 이웃과 함께 걷는 가치 있는 삶은 기록으로 남는다.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주동근 회장을 비롯한 복싱 애호가들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이 어둡고 긴 터널을 걷고 있는 복싱인들에겐 한줄기 빛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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