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한·중·일 생활이야기

한국의 떡국은 나이와 복을 더해 주는 음식

설날이다. 차례를 올린다. 어른께 세배도 드린다. 덕담을 나눈다. 그 중심에 새해를 맞아 가족과 나눠 먹는 세찬(歲饌)이 있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께서는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흰 가래떡을 쪘다. 전을 부쳤다. 만두도 빚었다. 이런 음식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먹는 느낌이었다. 온 가족이 어울려 정을 나누는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떡국 ⓒ 불러그 갈무리
한국의 떡국 ⓒ 불러그 갈무리

한·중·일 3국 모두 설날 음식을 먹으면 정을 나눴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다를 뿐이다. 같은 듯 다른 한·중·일 세 나라의 설날 음식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나라 설날 음식으로 떡국을 빼놓을 수 없다.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먹는다”라는 얘기가 있다. 떡국은 가래떡을 가늘게 썰어 낱개로 넣고 끓인 탕국이다. 이를 옛날엔 병탕(餠湯), 백탕(白湯)으로 불렀다. ‘흰색 떡국’이라는 뜻이다. 설날 먹는 흰색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했다. 글자 그대로 ‘나이 더해 주는 떡’이다. 

그렇다면 왜 설날 흰색 떡국을 먹었을까. 떡국은 하얗다. 흰색은 천지 만물의 시작과 탄생을 의미한다. 깨끗한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가래떡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래떡을 동그랗게 썬다. 옛날 화폐가 동그란 엽전이었다. 재물을 뜻한다. 당연히 이 같은 성스럽고 음식은 나눠 먹는 게 이치에 맞을 듯하다. 조선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열량세시기》,《동국세시기》 등에서는 “떡국이 제례음식으로 설날 세배 온 분에게 세찬으로 대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설날에 떡국을 먹었을까. 그 유래에 관한 기록(문헌)은 없다. 다만 제례 음식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유추한다. 우리나라는 농경 국가다. 특히 쌀이 흔한 나라였다. 당연히 쌀을 국가적 제례 음식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것이 민가에 전해지면서 하나의 풍습으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상고시대 이래 신년 제사 때에 먹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풍습으로 정착되는 과정은 지역적 특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충청도에서는 얼마 전까지 가래떡을 썬 떡국이 아니라 ‘날 떡국’을 먹었다. ‘날떡국’은 반죽한 쌀가루를 수제비 뜨듯이 손으로 떼어내 끓인 떡국이다. 개성에서는 ‘조랭이떡국’을 먹었다. 조랭이떡국은 마치 조롱박처럼 생겼는데 어린이 설빔에 조롱박을 단 데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다. 길상 동물인 누에고치의 모양을 흉내 냈다는 얘기도 있다. 조랭이떡국의 유래와 관련 다른 설도 있다. 1930년대에 쓴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에 나오는 얘기다. 개성사람의 원한과 분노가 사무친 음식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려가 망한 뒤 고려의 왕족인 왕 씨는 멸족됐다. 이성계가 왕권을 찬탈한 이후 왕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모두 죽였다. 강화도, 거제도, 제주도 등 섬에 왕가의 마을을 만들어준다고 속였다. 배에 태우고 섬으로 가던 도중에 배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왕조가 왕 씨 씨를 말리려고 이 같은 몹쓸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개성사람이 이를 보고 원한이 사무쳤다. 그래서 설 떡국을 이성계의 목을 비틀 듯이 만들었다고 한다. 개성사람의 원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개성사람은 돼지고기 수육을 ‘성계육’이라고 불렀다. 이성계를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는 심정을 담은 것이다.

복과 재물을 싸는 중국의 만두

일본도 오조니(お雑煮)라는 떡국을 먹는다. 우리는 설날 먹지만 섣달그믐에 먹는 세밑 음식이다. 고깃국 물을 내고 쌀떡을 사용하는 한국의 떡국과는 달리 찹쌀로 만든 떡을 된장 국물에 넣어 끓인다. 중국에도 설날 떡을 먹는다. 이를 니엔까오(年糕)라고 부른다. 새해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새해 떡의 발음은 “해마다 더 좋아진다”라는 니엔까오(年高)와 발음이 같다. 새해 떡을 먹으며 발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다만 새해 떡은 벽돌 모양이다. 황색이나 백색으로 만든다. 이는 금괴와 은덩이를 상징한다.

오조니(お雑煮) ⓒ 불러그 갈무리
오조니(お雑煮) ⓒ 불러그 갈무리

중국은 떡국보다는 만두 즉 쟈오쯔(餃子)를 훨씬 많이 먹는다. 중국에서는 설날이 아니어도 손님이 오는 날엔 칼국수를, 손님이 가는 날엔 만두를 대접한다. ‘칼국수는 자주 오라’는 의미를, 만두는 ‘나쁜 것은 속에 다 집어넣고 좋은 것만 갖고 가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우리나라도 남부지방은 세찬(歲饌)으로 떡국을, 북부지방은 만두를 먹는다. 북부지방은 쌀이 풍족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중부지방에서 이를 절충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떡만둣국을 먹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떡국과 만둣국에서 유래됐다. 옛날에는 꿩으로 육수를 냈는데 점차 닭으로, 지금은 소고기로 대체되고 있다. 만둣국은 19세기 이전의 문헌에는 세찬 음식으로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다. 그 이후엔 기록에는 사라졌다. 그것은 만두의 역사에 적지 않은 곡절이 있다는 의미다.

만두는 중국으로부터 고려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중국은 밀가루로, 우리는 메밀가루로 만두를 빚었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정도가 예외였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두피를 만들고 채소를 썰어 소를 넣어 네 귀를 오므려 붙인 것을 ‘편수’라고 한다. 개성은 돼지고기의 명산지라 소에다가 제육을 섞어 넣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개성 편수’, 즉 ‘개성만두’다. 1670년경 안동 장 씨가 쓴《음식디미방》에 메밀가루를 이용한 만두피 빚는 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메밀 만두피는 밀가루 만두피와 달리 점성이 약하다. 그만큼 만두피 빚기도 어렵다. 만둣국의 소가 터지기 일쑤다. 허균이 쓴 《도문대작》은 “17세기 초반까지는 만두와 떡국을 차례에 올리고 세찬으로도 먹었다”라며 “이후 서울의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떡국이 세찬으로 소비됐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문헌에는 설날 세찬으로 떡국만 등장한다. 만두는 나오지 않는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색깔 때문으로 추정한다. 검은색을 띠는 메밀로 만든 만두, 그리고 피가 잘 깨지는 메밀만두가 점차 떡국에 밀리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후 흰색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만두가 다시 세찬 음식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세찬 음식: 니안예판(草夜半) ⓒ 불러그 갈무리
중국의 세찬 음식: 니안예판(草夜半) ⓒ 불러그 갈무리

중국의 세찬 음식은 무엇이 있을까. 중국의 세찬 음식을 니안예판(草夜半)이라고 한다. 쟈오쯔라는 만두가 대표적 설날 음식이다. 북부지방에서는 설날 모든 가정에서 쟈오쯔를 만든다. 만두는 소를 집어넣고 말발굽 모양으로 만두피를 싼다. 옛날 은화인 원보(元寶)라는 화폐 모양이다. 복과 돈을 쌓는다는 의미가 만두에 들어 있는 것이다. 어떤 중국 가정은 한 개의 교자에 조그마한 황금을 넣는다고 한다. 먹는 사람은 특히나 복을 많이 받게 된다는 뜻이다. 

남부지역의 세찬 음식은 두부와 생선이다. 두부의 부(腐)자, 생선의 어(魚)자를 붙여 발음하면 ‘푸유’가 된다. 푸유는 우리말로 부유(富裕)다. 재산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는 중국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찬 음식처럼 절기음식은 통째 요리한다. 닭이나 오리 요리도 많이 상에 오르는데 닭 볏, 오리발까지 그대로 살아있는 듯이 요리한다. 만일 손님에게 생선이나 닭요리를 대접할 때 닭이나 오리 머리가 손님을 향하면 큰 실례가 된다. 불운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긴다.

일본 세밑에 떡을 먹는다.

일본에는 만두가 세찬 음식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본에는 ‘토시가미(歲神)’라는 신이 있다. 오곡의 신이다. 토시가미를 맞는 행사를 연초에 한다. 이 행사 동안 음식을 조리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풍습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세밑에 며칠 동안 먹을 졸임 음식을 해둔다. 이를 오세치료리(おせち料理)라고 한다. 만두는 굽거나 끓이고, 찌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만두가 일본의 설날 음식으로 정착하지 못했다.

명절 음식을 만들려면 여성들의 고생이 무척 많다. 심지어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최근에는 시장에서 구매한 음식을 차례를 여행지에서 지내는 일도 흔하다. 본래 제사음식을 가족이 함께 만들면서 가족의 공동체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우리 조상은 과다한 세찬 음식을 마련하지 않았다. 집안의 권위와 체신을 생각해야 했던 기제사 음식보다 훨씬 단출했다. 이이 선생이 쓴 《계몽요절》에 의하면 세찬 음식을 “계절에 맞는 몇 가지 음식”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 기제사보다 명절 제사가 중시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핵가족화가 추진됐습니다. 고향을 떠난 자녀, 형제들이 부모와 가족을 찾는 시기가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은 뼈대 있는 집’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허례허식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와 같은 진설법도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중국은 한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았다. 우리처럼 분가하지 않았다.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오대통당(五大統黨)을 이상적 가족상으로 여겼다. 5대가 한 상에서 식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명절이 되면 타지에 있는 가족이 고향으로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못 오는 자녀와 형제자매를 대체하는 방법이 있다. 함께 세찬을 나누지 못하는 가족의 밥그릇과 젓가락을 놓아둔다. 특히 중국에서 젓가락은 조상과 후손을 뜻한다. 우리가 가게의 문지방에 북어와 실타래를 매달아두듯이 중국은 조상이 쓰던 젓가락을 가게 문에 달아둔다. 이 역시 후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일본은 아예 명절이 되면 여성의 가사노동에서 해방된다. 그믐날 3일에서 5일 동안 가족이 먹을 음식(오세치 요리)을 해둔다. 3~5단짜리 찬합에 다양한 졸임 음식을 담아 둔다. 찬합 통이 겹겹이 쌓이듯 ‘경사가 겹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새해 오세치 요리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축하와 축복의 의미가 담긴 붉은색과 흰색을 기본으로 한다. 이에 곁들이는 노란색은 부(副)를 상징한다. 검은색은 건강을 나타낸다. 그리고, ‘오세치’의 모든 음식은 무병장수와 자손 번성,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요즘에는 오세치료리도 백화점은 물론 편의점에서도 판매하고 있다. 일본 여성의 세밑은 옛날보다 더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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