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20대 청년기에 식민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날

1944년 7월 7일은 일제시대에 청년 장준하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훈련받던 중국의 일본군 부대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날이다. 

탈출의 목적에 대해 장준하 선생은 “나의 절망속의 일루의 희망은 내가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 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다”, “충칭엔 왜 가는가? 충칭에는 우리 민족을 살릴 조국의 힘, 그 호수 속에 뛰어들고 싶어 가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당시 탈출할 때의 비장한 심정을 장준하 선생은 ‘항일대장정 수기 돌베개’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1944년 7월 7일 이 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충칭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그렇게 탈출 후 청년 장준하는 7개월 가량의 긴 기간을  6천리 길을 걸어 이루 필설로 더할 수 없는 고난 끝에 꿈에도 그리던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김구 주석을 만나고, 광복군에 편입됐다. 

그 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진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국내로 들어온다.

이후 남쪽에서의 장준하 선생의 삶은 한마디로 애국, 애족, 애민의 정신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독재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어찌하여 청년시절부터 식민지 조국을 구하려 목숨 건 모험을 감행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정권과 싸웠던 장준하 선생은 결국 살해당하고, 비슷한 청년기에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만주의 일본군이 되기 위해 혈서까지 써가며 일제에 부역하고, 해방 후엔 군사 쿠데타에 군부독재의 사악한 씨앗까지 뿌린 박정희는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되었단 말인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이 대목이 나에게는 해방 후 친일청산 실패와 더불어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다. 여운형 선생과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것 이상으로 분하고 원통하다.

당시와 같은 엄혹한 상황에서 탈출을 꿈꿀 청년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장준하 선생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던질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청년시절에 일본군에서 탈출을 감행했고, 그 후 OSS의 한반도 진공훈련에 자원했고, 그 엄혹한 박정희 통치하에서 펜과 맨 주먹으로 투쟁의 맨 앞에 섰던 것이리라. 

장준하 선생의 위대함은 그의 삶의 어느 일정 기간에만 있지 않다. 그의 청년 시절부터 박정희에게 의문사를 당할 때까지 그의 전 생애가 위대한 삶의 연속이었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위인을 발굴하거나 이미 알려진 위인들에 대해서도 예우하는 것에 지극히 인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지금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후대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위인 중 대표적 인물은 발자취나 인품 면을 같이 고려할 때 단연 장준하 선생이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잊혀가는 장준하 선생이 후대에 널리 기억되고, 자라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그를 사표로 삼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20대 청년기에 식민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날인 7월 7일을 ‘장준하의 날’로 지정하여 기릴 것을 제안한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 여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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