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산 김덕권 원불교 문인협회 회장용서받지 못할 죄 

 

세상에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을까요? 죄는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것이 죄입니다. 그 중에도 저는 ‘청춘을 낭비한 죄’가 가장 큰 죄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창 학문에 힘을 쓰고 인격을 도야하며 생업에 매진해야할 젊은 시절을 몽땅 낭비하여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겪어 왔기 때문이지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돌과 두 여자>라는 작품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두 여인이 하루는 덕망이 높은 노인 앞에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은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사실 때문에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여자는 본인 스스로 지금까지 자기는 도덕적으로 절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아서 뉘우칠 것이 없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다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여자였습니다.  
 

노인은 그 여자들에게 어떻게 찾아왔냐며 물었습니다. 한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는 죄를 많이 범했다며 고백하고 어떻게 하면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겠느냐며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다른 여자는 자기는 이렇다 할 죄를 지은 것이 없으므로 떳떳하기 때문에 다른 삶의 지혜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다른 삶의 지혜를 가르쳐 달라는 여자에게 정말로 죄를 지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진짜로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크게 죄를 지은 바가 없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두 여자에게 말합니다. 우선 첫 번째 여자에게는 “당신은 저기 가서 큰 돌 찾아 하나 주어오게, 가급적이면 큰 돌로” 
 

그리고 두 번째 여자에게는 “당신도 저기 가서 같이 돌을 주어오는데 될 수 있으면 자그마한 돌을 많이 모아서 들고 오게나.”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밖으로 나갔지요. 노인의 분부대로 한 여자는 큰 돌을 하나 들고 왔고, 다른 여인은 작은 돌을 여러 곳에서 많이 모아 돌아왔습니다. 
 

노인은 돌을 들고 온 여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아까 들고 왔던 돌을 다시 있던 그 자리를 찾아 갖다 놓고 오게.” 여인들은 노인의 말대로 돌을 갖다놓으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처음 여자는 쉽사리 먼저 자리를 찾아 그 돌을 갖다 놓았는데 다음 여자는 그 많은 돌들을 어디서 주어 왔는지 제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 방황하다가 그냥 다시 가지고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를 보고 노인이 두 여인에게 말을 합니다. “그래,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죄를 범하고 사는 일이 바로 이와 같다네. 먼저 당신은 그 돌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찾아 다시 놓고 올 수가 있었지만, 반면에 당신은 가져온 작은 돌이 너무 많아 어디서 주어왔는지 제자리를 기억하지 못해 다시 가져온 걸세.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매사에 겸손하게 살면서 타인의 비난이나 양심의 가책을 견디며 살아와 그 죄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되었지.  
 

반면에 죄 지은 바가 없다고 주장한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지은 죄가 없겠지만, 당신도 모르게 지은 작은 죄들이 아마 수없이 많을 걸세. 다만 기억을 하지 못해서 일뿐이지.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가 비록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죄들을 가볍게 여기고 간과해서는 안 된다네. 늘 겸허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어떻습니까? 알고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신하실 수 있는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죄가 크건 작건 간에 누구나 짓고 살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 얘기입니다. 또한 눈에 드러난 큰 죄만이 죄가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지었던 작은 죄일지라도 모이고 모이면 큰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망각이 아닙니다. 깊은 상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지만 용서는 상처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줍니다. 용서는 행동이며 선택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쓴 뿌리는 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상대를 닮아가게 되고 자신조차 미워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는 자신이 받습니다. 세상엔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용서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죄인 것입니다. 
 

그럼 그 죄를 용서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참회(懺悔)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참(事懺)이고 또 하나는 이참(理懺)입니다. 사참이라 함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전에 성심으로 죄과(罪過)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善)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 성(罪性)이 공(空)한 자리임을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煩惱妄想)을 제거해 감을 이름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雙修)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善業)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貪) 진(瞋) 치(癡)를 제거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차게 만들려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 천 겁(百千劫)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淸淨)해 지는 것이지요.  
 

한 마음 돌리면 악인도 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같이 청춘을 낭비한 죄인도 이렇게 사참과 이참을 통해서 죄를 멸(滅)해가며 새 사람, 새 인생, 새 일꾼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영생을 통해 알고도 모르게도, 혹은 크게도 작게도 지은 죄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이 참회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엄젠가는 크고 작은 모든 죄의 과보(果報)를 면할 길이 없어 길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죄대로 받고 복은 복대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알고도 지은 죄를 참회하여 새 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깊이깊이 참회합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이 중생의 용서받지 못할 죄를 깊이깊이 참회합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네요!

 

 
단기 4349년, 불기 2560년, 서기 2016년, 원기 101년 12월 1일

덕산 김 덕 권(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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