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S 타이태닉(영어:RMS Titanic)

RMS 타이태닉(영어:RMS Titanic)은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타이타닉의 침몰로 1,514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평화시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 가운데 하나이다.

RMS 타이타닉은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운데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RMS 올림픽을 시작으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을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RMS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에 있는 해럴드 앤 울프 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하여 1911년 5월 31일 진수하였다.

첫 항해에 오른 승객은 다양했으며 이 가운데에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다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출항 당시 승선 인원은 2,223 명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선내에 체육관과 수영장, 그외 호화로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그런데 느슨한 규제때문에 구명정은 20척 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빙산과 충돌하였고 이 때문에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우현에 구멍이 났다.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타이타닉 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사고에선 역부족이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수 분 내에 저 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침몰할 당시까지도 배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 RMS 카르파티아에 의해 구조된 사람은 710명에 불과하였다.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카 페리선이며, 건조 후 일본 마루에이 페리(マルエフェリ株式社, A-Line Ferry Co.,Ltd.)사에서 약 18년간 Ferry Naminoue(フェリなみのうえ 페리 나미노우에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오키나와를 운항하다가 2012년 10월 1일을 나하 발 운항을 끝으로 퇴역하였으며, 같은 달 중고 선박 시장 매물로 올라온 이 선박을 청해진해운이 2012년 10월에 매입하여 개수 작업을 거친 후 세월 호(歲月號)라는 이름으로 2013년 3월부터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하였다.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세월 호와 오하마나 호 뿐이었다.

인터넷에서 세월 호나 오하마나호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이 취득했던 제주-인천 간 면허가 취소되고 사실상 회사가 사라지게 되어서 더 이상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없다. 명칭인 세월 호는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歲月(해 세 + 달 월)이다. 이름은 유 병언 회장이 직접 지었고. 작명을 사유로 한번 출항 시 수 천만 원의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초에 정확한 한자표기가 알려지지 않아 가장 흔한 단어로 음차한 명칭인 歲月號라는 명칭으로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보도되었으나 일부 언론에서 나온 세(世)상을 넘는다(초월(越)한다)는 의미가 퍼지면서 수정 보도되고 있다.

중국 방송의 수정 보도(중국어 링크): 한국 조선일보를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래 중국어권에서는 표음문자의 특성상 외국어의 정확한 명칭을 알아낼 때까지는 가칭을 쓴다. 그러다 2015년 7월 26일 구원 파 및 유병 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에 따라 다시 歲月로 정정되었다.

당초 600명 정도가 타는 배였는데 300여명 정도를 더 태우기 위해 배 뒤쪽에 객실을 추가하였다. 선수부 우현 사이드 램프 도어(램프웨이) 제거가 되었으며, 배 뒤쪽을 개조했다는 전직 세월호 기관사의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객실을 증축하면서 세월호의 무게는 페리 나미노우에(4대)때와는 달리 239톤이 증가했다. 이게 첫 개조가 아니었는데 일본에서도 이미 1994년 건조한 지 불과 한달만에 589톤이 증가했었다. 결국 맨 처음 개수했을 당시 5,997톤이었던 선박은 개조로 인해 6586톤으로 증가했고, 개조한 세월호의 순수 선박의 무게가 일본당시 239톤 + 한국에서 589톤 총합 838톤 증가하여 6,835톤에 달했다.

선장 이준석이 구속될 때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사고 해역은 맹골 수도로 물살이 굉장히 빠른 지역이다. 구조선이 도착하기 전에, 지나치게 빨리 바다에 뛰어들 경우 빠른 조류의 영향으로, 사고 지점에서 상당히 멀리 떠내려가서 생존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세월 호 침몰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은 약 11~12도 정도로 추정되며, 그 정도의 수온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서 물에 떠 있다 하더라도, 생존 시간이 일반적으로는 1시간, 최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류로 떠내려갈 경우, 바다에서 1시간 이내에 다른 선박에 발견되어 구조되기는 지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09시 20분경, 사고 지점에 최초로 도착한 유조선 두라에이스 호는 2700톤급 선박으로 작은 배가 아니다. 충돌 우려 때문에 세월 호에 가까이 붙여서 구조할 수 있는 배는 아니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구명정은 모두 불량이어서 펴지질 않는 상태였다. 따라서 선박 직 승무원들은 구조선이 도착한 이후에도 5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기 때문에 승무원 신분인 자신들이 구조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이라는 우려와 구명정 승선절차 없이 그냥 퇴선 명령을 내려서 바다에 500여명이 구명조끼만 대충 입고 뛰어든다면, 비록 어느 정도는 구조된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 떠내려가는 인원을 감안하면, 최소 수십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서 판단을 지체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배는 더욱 기울었고, 결국 자신들이라도 먼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피 방송이고 뭐고 일단 빠져 나오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순직한 서비스직 승무원 박 아무개가 무전으로 계속 퇴선명령 여부를 조타실에 문의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전기는 무전기를 가진 전원에서 송수신 내용이 다 들리기 때문에 못 들었다거나 고장 났다거나 하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 이외의 선박 직 이외의 다른 승무원을 포함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되는데 걸리 적대는 장애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정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이들 선박 직 선원들은 해경 123정의 보트에 의해 기관 직 승무원들 다음 두 번째로 구조되지만, 자신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된 이후에도 승객 퇴선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해경에 그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승무원 중 1등 항해사 강 아무개는 구조된 이후에 자기 소지품인 휴대폰을 챙기려 배에 다시 올라 자기 휴대폰은 챙겨 오면서도 퇴선명령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그냥 아무 지시도 없이 줄행랑을 친 것도 아니고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의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조된 이 행동이 어찌나 기이했는지 처음 사고소식을 듣고 현장에 출동했던 어선의 선장은 갑판 위에 나온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사고현장상황을 배가 화물선이어서 승선인원이 얼마 안 되거나 이미 상당수 인원이 구조되었단 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긴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이렇게 판단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안내방송을 담당한 승무원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안내방송 담당 서비스직 직원 강 아무개는 사고 최초 시점에서 기운 배에서 움직이면 위험할 거 같아서 자기 판단 하에 첫 안내방송을 했고 이후 조타실 지시에 따라 선내에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그리고 9:30분 이후 선원들이 탈출하여 더 이상 추가지시가 없어서 어쩔 줄 몰라 대기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10시까지도 되풀이했다. 결국 침수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시점(=직접 위험인지)이 되어서야 탈출명령은 전파되었으나, 이미 배는 심하게 기울고 물은 급격히 들어와 다수의 내부승객들이 탈출의 적기를 놓쳐버렸다.이번 참사에서 인명피해가 극대화된 가장 어이없는 원인이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었음을 생각할 때 안내방송 담당자의 책임도 가볍지는 않다. 선박 직 승무원은 아니지만, 안내방송을 한 강 아무개는 1년 이상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지만 선박안전에 대한 지식에선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일반인만 못했다.이런 상황에서라면 기울어진 배에서 움직이면 넘어지거나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쳐 다칠 수 있다는 안전교육 내용은 떠올려서 자기 판단으로 방송을 했지만, 배가 복원한계를 넘어가 기울면 결국 침몰하며 기울수록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지식은 갖고 있지 못했다. 탈출지시여부를 물었으나, 선박 직 선원들에게서 어떠한 응답도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이 동요하자, 동요를 막기 위해 방송을 되풀이했다. 조타실의 추가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아예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승객들은 알아서 각자 살길을 찾았을 것이다.

퇴선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시각각 배가 기우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상황에서 대기 지시 후 무 대응으로 일관한 선박 직 승무원들에게 무언가 사고로 인해 신상에 이상이 생긴 것 정도로 자체 판단하고 탈출을 지시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안내 방송을 안할 수는 없었는지 두고두고 안타까운 부분이다. 게다가 사고초기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고책임을 의식했는지 안내방송의 정확한 경위에 대하여 얼버무리는 모습도 보인다.

배식을 담당하던 주방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직원은 "성실하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안내방송 담당 강 아무개도 결국 검찰에 구속되었다. 조타실과 안내방송 지시의 주체와 경위에 대한 수사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직원은 대기 지시를 믿고 착실하게 따른 탓에 참사를 당한 학생&교사들과 더불어 지시 매뉴얼을 믿고 고지식하게 따른 탓에 결과적으로 악마의 방송을 해 버린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그 외에 배안에서 대기하라고 한 추가적인 이유는 과거 세모그룹 시절 너무 일찍 물속에 뛰어들어 피해자를 많이 낸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구조선이 올 때까지 배안에서 기다리라는 것이 청해진 해운 회사 내부 지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필 또 이 사고 당시의 승무원 중 하나가 이준석이었다. 즉 이준석에게 사고 났을 땐 배에 대기시키는 게 안전하다란 잘못된 경험칙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예견된다.

타이타닉 호와 세월 호, 타이타닉이 침몰했을 때 수천 명이 사망을 했어도 영국여왕이나 영국수상이 책임을 진적은 없다.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다가 사고사를 당한 것이니, 당연히 국가수반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세월 호는 그리스도를 팔아 치부를 한 돈으로 일본에서 폐기처분된 선박을 사드려 개조를 해 유람선을 운행한 유병언의 책임이다. 그렇기에 그는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했다. 아까운 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고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탄핵의 사유에 덧붙여 대두시키고 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세월호의 침몰과 연관된 7시간동안의 대통령의 행적을 대라니, 생떼를 써도 지나치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간통을 한 여인을 많은 사람이 모여 돌로 처 죽이려 하니, 예수가 등장해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 하자 모두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그런데 어쩐 일로 책임을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고, 돌을 던지라고 선동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한 자들이 돌이 아닌 창과 칼로 내려치는 형국이니,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간특한 선동에 넘어가 시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이성을 되찾고 자중하기를 바란다. 정권찬탈야욕으로 눈이 뒤집힌 비이성적 비양심적 선동자의 꼬임에 넘어가면 나라는 영원한 어둠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제발 이성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박정기 컬럼니스트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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