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은 대체로 1905년 을미사변으로부터 본격화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1907년 조선군대가 강제로 해산됨으로써 해산된 군인들에 의해 의병 무장투쟁이 시작된다.

1910년 결국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난후 항일독립선열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하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이등박문 저격 사격이 발생하고 1910년 3.1독립혁명이 일어남으로써 국민 모두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가 타오르게 되고, 우리도 힘을 합하면 독립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군사력은 점점 강해져 중국까지 침략을 함으로써 항일독립선열들은 이제 중국에서 조차도 독립운동을 할 수 없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선열들은 이때 비로소 나라를 되찾으려면 현재까지의 교육운동, 계몽운동 가지고는 부족하고 일제와 직접 전쟁을 하는 무장독립투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중국 또는 러시아와 힘을 합해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무장독립운동은 중국 국민당과 함께하는 광복군 세력과 중국 공산당과 함께하는 조선의용대 세력, 러시아와 함께 하는 항일 빨치산 세력을 나뉘게 된다. 당시 독자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 및 러시아 세력과 힘을 합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미국과 공동으로 조선 침투 비행기 공습작전까지 세우게 된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일제와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갑작스레 해방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광복군은 미국, 중국, 러시와 같은 참전국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비극인가? 5년 후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여 광복군은 한국군으로, 조선의용대 및 항일빨치산 부대는 북한인민군으로 참전하여 같은 항일독립선열끼리 총을 쏘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 

서울 강북구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중국 산서성, 태행산 지구, 태원, 임현 등 대륙 각지에서 항일무장 독립투장하다 전사, 순국, 자결하신 17위를 모신 곳이 있다. 바로 무후광복군합동묘역이다. 해방 이후 살아남은 광복군들이 귀국하면서 순국하신 동지의 유골을 모셔와 1967년 합동묘소를 조성하였고, 1985년 8월 15일 국가보훈처에서 다시 예산을 들여 지금과 같은 묘역으로 단장하였다.

2006년 추석부터 고 박갑수 교수를 중심으로 뜻있는 등산객이 무후제를 지내기 시작했고, 2010년부터는 강북구 풍덩예술학교, 지구촌청소년연맹이 참여하여 잔디이식과 성묘제례를 지냈고, 추모음악회도 개최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그간 참가 단체 전체를 통합하여 “무후광복군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제례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이곳 합동묘소에 안장된 17분의 이름을 불러 본다. 김성률, 김순근, 김운백, 김유신, 김찬원, 동방석, 문학준, 백정현, 안일용, 이도순, 이한기, 이해순, 전일묵, 정상섭, 조대균, 한휘, 현이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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