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코스는 한양도성의 서쪽의 문 돈의문에서 시작하여 성벽을 따라 인왕산의 정상을 오르고 하산하여 창의문 근처 윤동주시인의 언덕까지 거쳐가서, 그곳에서 국악공연을...

국악공연과 함께하는 한양도성 순성에 참가자들 =사진/김학영 기자

[서울=뉴스프리존]김학영 기자= 지난 16일 오전 10시 서울시와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마련한 6회차 해설이 있는 프로그램 ‘국악공연과 함께하는 한양도성 순성’ 가운데 여섯 번째 기행인 ‘인왕산구간’편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서울도시문화지도사 '최서향 해설사'와 참가자들이 돈의문 박물관마을 마당에 모였다.

국악공연과 함께하는 한양도성 순성에 참가자들 =사진/김학영 기자

이날 코스는 한양도성의 서쪽의 문 돈의문에서 시작하여 성벽을 따라 인왕산의 정상을 오르고 하산하여 창의문 근처 윤동주시인의 언덕까지 거쳐가서, 그곳에서 국악공연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코스였다.

돈의문은 다른 이름으로 서대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돈의문 쪽에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경찰서 등을 만들게 되는데, 철도의 종착역을 서대문정류장으로, 이는 도시개조사업으로 일본인들이 돈의문을 서대문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남은 일본의 잔재인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한양도성의 문들의 별칭을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숭례문을 남대문,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고 실제로 많이 불렀다. 하지만 돈의문을 서대문이라고 부른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국악공연과 함께하는 한양도성 순성에 참가자들 =사진/김학영 기자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정상 부분은 대부분 남아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도시가 확장되면서, 또는 성벽에 기대어 집들을 지으면서 숭례문을 지나 정동에서 월암근린공원까지 성벽은 흔적조차 없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한양도성의 서쪽의 문인 서소문과 돈의문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없어져 우리는 문이 있던 자리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참가자들 인왕산 정상에서=사진/김학영 기자

한양도성은 태조 때 처음 축조한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개보수를 반복했던 만큼 성돌의 형태와 축성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성돌의 형태에 따라 쌓은 시기를 추정하며 일반적으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의 네 시기로 나눠진다. 이렇게 작은 메주 같은 경우는 세종대에 축성했던 것이며, 약 60cm가량의 정방형은 순조 대 것인데, 현재 복원하다보니 이렇게 깨끗한 돌로 축성하였다.

김명남 명창과 조풍류 고수 판소리 한마당 =사진/김학영 기자
김명남 명창과 조풍류 고수 판소리 한마당 =사진/김학영 기자

한양도성을 따라 걷다 보면 도성의 일부를 바깥으로 둥그렇게 돌출시켜 쌓은 성이 있는데, 이를 ‘곡장’, ‘곡성’ 또는 ‘용도’라고 부른다. 곡장은 적의 동태를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성벽을 오르는 적을 좀 더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인왕산과 백악산에 하나씩 있다. 인왕산 선바위 위쪽에 무악재 쪽으로 툭 불거져 나온 곡성이 있다. 성벽 바깥쪽은 절벽처럼 가파른 경사면으로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도성의 방어와 감시에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

한양을 건설할 때는 중국 주나라의 주례의 예법에 ’좌묘우사’ 경복궁의 좌측에 종묘와 우사 오른편에 사직단을 세우고, ’전조후시’라 하여 경복궁 앞으로 관청을 ‘후시’ 뒤로는 시장을 조성하게 되었고, 그러나 경복궁의 뒤는 백악이 자리하여 시장은 지금의 종로거리에 운종가라 하여 시장을 조성하고 관청은 광화문의 앞 넓은 거리에 들어섰다.
지금은 광화문광장으로 불리는 세종로 양쪽으로 좌측은 의정부, 한성부, 이조, 예조, 호조 우측으로는 삼군부와 병조, 형조, 공조, 사헌부 등이 자리하여 ‘관청의 거리’ 라고 불렀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참여 인원이 20명으로 줄었지만, 온라인 유튜브(어반티비) 생중계로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국악공연을 통해 몸과 마음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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