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고해(苦海)라 했습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불가(佛家)의 수행이라는 것은 이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럼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고(苦)의 원인은 ‘탐진치(貪嗔痴)’입니다. 그리고 부정당한 낙(樂)으로 인하여 고가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방하착(放下着)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서 고통을 벗어나려면 ‘집착(執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방하착입니다. 그간 우리가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알고 보면 코 풀기보다 쉬운 것이 수행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헤매지 말고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인 것이지요. 우리의 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이 모든 경계(境界)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것입니다. 이 집착을 버리고 가는 길이 방하착인 것이지요.

한 수행인이 길을 떠났는데 산세가 험한 가파른 절벽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서 ‘사람 살려!’라는 절박한 소리가 실낱같이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발을 헛디뎠는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하고 물어보니 다급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사실은 나는 앞을 못 보는 봉사올시다. 산 너머 마을로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있습니다.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속히 저 좀 구해주시오! 이제 힘이 빠져 곧 죽을 지경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자가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땅바닥에서 겨우 사람 키 정도 위에 있었지요.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님에게 외쳤습니다.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 이상 힘 안 들이고 편안해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밑에서 봉사가 애처롭게 애원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즉사할 것인데, 앞 못 보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애걸복걸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봉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손을 놓으시오.”라고 계속 소리쳤습니다.

그런 와중에 힘이 빠진 봉사가 손을 놓치자 땅 밑으로 툭 떨어지며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은 장님은 졸지에 벌어졌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멋쩍어하며 인사치레도 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네 인생도 도를 깨치지 못하면 앞 못 보는 장님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봉사가 붙잡고 있는 재색명리(財色名利)가 오직 자신을 살려주는 생명줄인줄 압니다. 이렇게 죽기 살기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곧 죽고 못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는 것이 중생(衆生)의 모습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재색과 명리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과도한 집착은 마치 요즘 보고 있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처럼 추하게 보이고, 가지고 있던 명예까지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정상(頂上)에 올랐으면 내려와야 합니다. 정상에 취해 내려오지 못하면 결국 얼어 죽게 마련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생명줄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놓아버려야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방하착’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온갖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있는데, 그런 것을 모두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리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고통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림을 면치 못합니다.

정산(鼎山) 종사는 어느 날 제자에게 “옥으로도 금으로도 못 견 줄 큰 보배가 있다.” “그것은 바로 평생 닦은 덕이요, 최후 일념 맑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태산(少太山)부처님께서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법문(法門)을 내리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력과 보시(布施)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은 것과 정법에 대한 서원(誓願)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만이 영원한 자기의 소유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만이 영원한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형상 있는 창고만 채우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무형한 진리세계의 창고를 채우면 좋겠습니다. 우리 탐욕과 아집, 버겁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이제 진리를 연마하여 방하작의 세계를 맛보다가 저 하늘의 흰 구름처럼 유유히 흘러가면 어떨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1월 2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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