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아직도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하다

[뉴스프리존= 이정현 / 문학평론가, 한국외대 강사] 새 정부가 수립된 지도 100일이 넘었다. 100일이 넘는 시간동안 세간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는 아마도 ‘적폐(積弊)’와 ‘청산’일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잘못된 관행과 부정, 비리 등을 청산해야 된다는 당위론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그런데 제도를 정비하고 사람을 바꾸는 과정에서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둘러싼 이견이 분분한 가운데 ‘우리를 청산하려는 당신들은 과연 깨끗하냐’는 항변이 뒤섞인다. 적폐의 목록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잃은 것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언어’의 상실이 아닐까. 수첩과 프롬프터가 없으면 제대로 된 언어조차 구사하지 못했던 전(前)대통령의 기억이 스쳐가지만 그것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굳이 언어학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인간은 제한된 언어만큼 사고력을 잃는다. 사회 구성원들의 언어가 제한되고 획일화되면 그만큼 권력의 지배는 수월해진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풍경 중 ‘신어사전’은 기시감이 짙다. 소설 속의 ‘신어사전’은 수많은 층위를 지닌 언어들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고 그것만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면서 정부가 펴낸 ‘권장하는’ 사전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제한이다.

독재권력의 언어 강탈

모든 권력자들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반론을 펼치는 자들을 유난히 싫어한다. 군사정권 시기에 대학과 지식인들이 가장 예민한 감시대상이었던 이유다.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곧 ‘언어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이것을 정확하게 직시한 것은 지난 두 정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와 ‘공론장’을 파괴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았다. 이 사실은 여러 사건들이 뒷받침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를 이용하여 ‘댓글공작’을 펼친 것과 방송을 장악한 것은 당장 정부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와 다양한 의견의 형성 자체를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다양한 층위를 잃고 이분법적으로 악용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정부가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당위를 선점하고, 그 방법론을 따지면서 비판하는 자들에게 “경제 성장에 반대한다는 것이냐”는 식으로 공격하면서 반론을 틀어막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애국’ ‘경제’ ‘성장’ ‘안보’ ‘안정’ ‘원칙’이라는 우호적인 가치를 지닌 언어들을 선점한 다음 정부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애국과 경제와 안보를 등한시한다는 이미지를 덧씌우면서 ‘좌파’ ‘종북주의자’ ‘비(非)애국자(비국민)’ 등으로 낙인을 찍는다. 실제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자들과 환경단체를 ‘종북주의자’들로 매도하는 공작이 이뤄졌고 국정원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찬반 클릭과 댓글에 ‘가격표’를 설정하고 민간인들에게 현금으로 대가를 지급해 왔다는 최근의 보도들이 적실한 증거다.

언어를 매개로 권력이 행사하는 이러한 폭력은 두 가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공론장의 파괴’와 ‘자기검열의 일반화’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아프게 상실한 것들의 목록에서 이 두 가지는 최상단에 위치한다. 지난 10년을 상징하는 몇 가지 풍경들이 스쳐간다.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보수단체의 시위에 국가가 관여하고, 반대자들을 위협(심지어 세월호의 애도조차도 ‘종북’으로 낙인찍는)하는 풍경, ‘일베’ 유저들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인터넷에서 벌이는 ‘사이버 폭민’적인 활동들, “정치성향은 알통이 좌우한다” “비오는 날에 먹는 소세지”라는 가십성 정보가 메인뉴스에 방송되는 풍경, 정치적 발언과 토론이 금기시된 대학 강의실, 인터넷 댓글에 난무하는 인격모독과 욕설들. 이것은 공론장이 소멸되는 과정이 담긴, 우리 사회의 무섭고도 슬픈 풍경화다.

언어의 다양한 층위가 소멸된 곳에서는 모든 의견이 여/야, 좌/우, 찬/반의 구도에 갇히고 토론은 실종된다. 그리고 정보는 왜곡되거나 악용되어 상대를 짓누르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인터넷 포털과 SNS, 방송, 대학, 시위 현장은 그렇게 공론장의 기능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국가는 공론장의 형성을 돕고 거기서 발언하는 개인들을 보호할 책임을 방기한 채 오히려 공론장의 붕괴를 획책했다. 이런 상황을 목도하는 개인은 서서히 자기검열의 늪에 빠지게 된다. 탄압이 분명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더구나 탄압의 방법도 진화했다. 군사정권 시절 탄압은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그러므로 저항도 가시화되기 쉬웠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탄압은 반대자에게 모욕과 망신을 주고 조용히 밥줄을 자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평범하고 사소한 개인이 모욕과 망신, 생계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자기 발언을 할 수 있을까. 검찰총장조차도 모욕과 망신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개인들은 순치된 발언만을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기를 택한다. 자기검열은 지속성이 강하다. 탄압의 위협이 사라지거나, 안전을 보장받더라도 한번 형성된 자기검열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현저히 줄어든 현실이 그 증거다.

광장을 밝힌, 촛불의 언어

지난 촛불집회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졌던 것은 억눌렸던 언어의 분출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사소한 목소리와 저항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극우주의자들과 정부가 노조와 시민단체를 ‘종북’ ‘불순’ ‘선동’의 상징으로 낙인찍고 ‘순수한’ 시민들과 구분 지으려고 하는 바람에 많은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촛불시위 초기에 깃발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 공백을 기상천외한 깃발-언어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성북동 고양이 집사들 모임’ ‘오버워치 폐인들 모임’ ‘게시판 눈팅족 연대’ ‘강남 막걸리 애호가들’ ‘그것이 알고 싶다 시청자 모임’ ‘전국 재수생 연대’ 등, 촛불이 타오르는 광장에서 ‘불순하고 선동적’이라는 프레임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모임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특정 노조와 시민단체는 탄압하기 쉬워도 ‘오버워치를 하는 폐인’들과 ‘고양이 집사’들을 탄압할 방도는 없다. ‘불순분자/순수시민’ ‘일반인/유족’ ‘(정치적)유족/ (순수)유족’ ‘좌파/우파’라는 언어도단으로 갈라치기를 시도하면서 재미를 봤던 지난 정권의 허를 찌르는 통쾌한 장면이었다. 그것은 이분법의 언어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는 시민들의 언어적 저항이었으며 교묘해진 탄압에 맞선 새로운 연대이기도 했다. 언어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공적인 언어(방송)를 지배하기 위해 편성했던 종편방송 중 하나인 JTBC의 보도가 박근혜 정권에 치명타를 가한 사실은 언어를 지배하려다 바로 그 언어에 의해서 몰락하는 권력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적폐를 청산하자는 구호가 분분하다. 시스템과 제도의 정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앞으로 더 많은, 다양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공론장의 회복에 필수적인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언어의 교환과 반대자를 억압하지 않는 분위기다. 대학과 방송, 그리고 예술작품은 언어와 공론장의 회복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용지와도 같다. 강의실과 방송에서 다시 토론다운 토론을 볼 수 있고 이념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은 텍스트들이 늘어나야 한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보장과 공론장의 회복이 가시적으로 느껴질 때가 되서야 지독한 자기검열에 빠졌던 자들의 언어도 되살아날 것이다. 적폐청산과 개혁은 언어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잃었던 것, 그러므로 시급히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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