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일본은 요지부동이고 할머니는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남은 자의 몫을 다하겠다"
14살 때 끌려가..日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 일본군 만행을 알리는데 적극 나서

[정현숙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운동에 평생 앞장섰던 이옥선 할머니가 26일 밤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증 생존자는 10명으로 줄었다.

이옥선 할머니가 머물렀던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은 27일 "이옥선 할머니가 26일 오후 9시 44분 분당 모 병원에서 별세하셨다"라고 밝혔다. 사인은 급성폐렴에 의한 패혈증으로 전해졌다.

26일 별세한 이옥선 할머니 생전의 모습. 나눔의집 제공
26일 별세한 이옥선 할머니 생전의 모습. 나눔의집 제공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14세였던 1942년 "취업시켜 주겠다"는 일본인 말에 따라 중국 만주 위안소로 끌려가 3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고초를 겪었다. 이 할머니는 1981년 귀국했으며, 1991년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던 고(故)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1993년 한국 정부에 피해사실을 알렸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인권 유린과 과거사 증언,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 일본군 만행을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2014년부터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근처 거처와 나눔의 집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2018년 나눔의집에 정착했다.

이 할머니는 2013년 8월 다른 피해자 할머니 등 12명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7년 5개월만인 작년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 승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여 "원고들에게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프랑스 파리 그랑제콜 연구교수로 초빙된 송영길 전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슬프고도 슬픕니다]라는 제목으로 절절한 추모의 마음을 했다.

송 전 의원은 "이옥선 할머니는 1928년에 대구에서 태어나셨다"라며 "1944년 10월, 일본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 준다며 일본군이 집으로 찾아왔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완강한 거절하고 저항했지만 결국 강제로 끌려가고 말았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도착한 곳은 만주 해성의 일본군 주둔지였다. 그곳에 있는 위안소에서 할머니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를 당하셨다"라며 "일본군의 명령을 거부하자 폭행을 당했고 그때 다리를 심하게 다쳐 오래도록 다리를 절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어느 날, 근처의 중국인에게서 조선의 해방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신의주를 거쳐 고향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라며 "그러나 몸도 마음도 병든 할머니에게 고향도 마음 편히 머물 곳은 못 되었다. 가족에게는 차마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만주에 다녀왔다고만 했다"라고 전했다.

송 전 의원은 "결국 고향을 떠나 속리산의 한 마을에서 약초 행상을 하며 생활하시다 1993년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었으며 수요집회 참가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오셨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듯 길게 고단했던 할머니의 생(生)을 적는 것은 우리 모두 똑똑히 기억하기 위함"이라며 "'사죄받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생전에 할머니께서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 때마다 부르짖은 말씀"이라고 전했다.

송 전 의원은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요지부동이고 할머니는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라며 "슬프고도 슬픕니다. 삼가 이옥선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남은 자의 몫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머나먼 이국에서 추모의 소회를 전했다.

이옥선 할머니의 유족은 딸 김경선씨와 조카 김성경씨가 있다. 빈소는 경기 광주시 경안장례식장 101호실. 발인 29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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