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민족시인·독립운동가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과 씨뿌린 사람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당시의 백기만(가운데)과 친구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당시의 백기만(가운데)과 친구들 / 사진제공=백기만 시인 유족

[뉴스프리존=박상봉 기자] 민들레 씨나 졸참나무 씨나 / 우리 동네 김 씨나 / 씨의 족속이긴 마찬가지인데 / 민들레 씨는 새가 먹고 / 졸참나무 씨는 다람쥐가 먹고 / 동네 김 씨는 혼자 먹는다. /먹고 싼 것이 또 씨가 되어 / 씨로 열매 맺고 / 씨로 나누어 먹고 / 씨로 돌아오는 것이니 / 씨 뿌리는 일은 과연 생산적이다. / 그렇다면 그야말로 몹쓸 짓은 / 씨 말리는 일이다. / 우리 동네 김 씨는 / 민들레 씨보다 부지런해 보이고 / 졸참나무 씨보다 힘세 보이지만 / 땅만 파는 농부라는 이유로 / 쉰이 다 되도록 총각이다. / 오늘도 씨불씨불하는데 / 씨 뿌리지 못해 / 말로만 씨부리는 탓이다. // -이동훈 시인의 시 「씨 뿌리다」전문

우리 모두 씨의 족속이다. ‘민들레 씨나 졸참나무나’ ‘먹고 싼 것이 또 씨가 되어 씨로 열매 맺고 씨로 나누어 먹고 씨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고 생각한다. 시와 관련된 모든 행위, 즉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를 발표하고, 시인을 연구하고 조망하는 과정들이, 농부가 씨 뿌리는 일과 다름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몇 해 전에 경북 영주작가회의 초청으로 멀리 영주까지 가서 ‘씨뿌리기 또는 시(詩)부리기’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문학토크 행사를 한 적이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부제로 나의 문학적 경험담을 생각나는 대로 한시간 동안 씨부리고 왔는데 실로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 때도 나는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고 열변을 토했다.

경북 영주작가회의 초청으로 열린 ‘씨뿌리기 또는 시(詩)부리기’ 문학토크 행사에서 필자가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경북 영주작가회의 초청으로 열린 ‘씨뿌리기 또는 시(詩)부리기’ 문학토크 행사에서 필자가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 ⓒ 박상봉 기자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 그 씨는 봄을 부르고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이상화ㆍ이육사ㆍ현진건 등과 함께 대구에서 왕성한 문학활동을 한 항일민족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시인이 저술한 『씨뿌린 사람들』이라는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글이다.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자는 말 그대로 작고한 예술가들의 평전들을 한 권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이 책자에는 시인 이상화ㆍ이장희ㆍ이육사ㆍ오일도, 소설가 현진건ㆍ백신애, 화가 김용조ㆍ이인성, 음악가 박태원, 영화감독 김유영 등 모두 10명의 작고 예술인에 대한 평전이 수록돼 있다.

1959년에 간행되어 나온 이 책자가 없었다면, 만약 백기만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해방 전후의 한국문단과 예술계의 텃밭을 일군 대구 경북지역의 주옥같은 예술인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책의 제호가 말해주듯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척박한 이 땅에 씨뿌린 사람들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기만 시인이 저술한『씨뿌린 사람들』은 대구 경북지역의 작고한 예술가들의 평전들을 한 권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기만 시인이 저술한『씨뿌린 사람들』은 대구 경북지역의 작고한 예술가들의 평전들을 한 권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 사진제공 = 대구문학관

책을 읽다 보면 뿌려진 씨앗에 거름을 덮어주고 정성을 다해 갈무리하며 꽃 피는 봄을 부르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편저자인 백기만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열악했던 출판계의 상황과 예술가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용이하지 못했을 자료수집 여건들을 감안할 때 『씨뿌린 사람들』이라는 이 책 한 권의 값어치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항일민족시인·독립운동가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 사진 제공=백기만 시인 유족
항일민족시인·독립운동가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 사진 제공=백기만 시인 유족

나는 백기만을 20대 후반에 알게 됐다. 어느 잡지사에서 이상화 시인에 대한 인물기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일제 치하에서 지사로서의 상화에 대한 행적을 더듬어 대구광복회관(조양회관)까지 찾아가 대구지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록들을 뒤져보게 됐다. 거기서 유독 눈길을 끄는 낯선 이름을 발견했다. 3.1운동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상화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백기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여러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그가 ‘상화와 고월’ 등과 교유(交遊)하면서 문단 활동을 함께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백기만은 항일민족 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로, 교육자이면서 언론인으로, 또 정치인으로 폭넓은 활동 범위를 가졌던 인물로 대구일원의 문화권역에서는 대부(代父)와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대에 그와 교분이 깊었던 문인들 대부분이 일찍이 작고하였거나 그가 남긴 저서마저 희귀본이 되어 구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를 연구하는 일조차 드문 까닭이다.

백기만은 16세의 나이에 현진건, 이상화, 이상백과 『거화』라는 프린트판 시동인지를 찍었다. 한국 최초의 시동인지일지도 모르는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행보였다. 1919년 이상화 등과 대구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서문시장 장날, 대구고보, 계성고, 신명여고 학생들과 상인들이 참여한 3.8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주동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그 당시 대구고보 학생이던 백기만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그 후에도 부산ㆍ김천ㆍ상주ㆍ안성ㆍ북만주 등지에서 옥살이를 하는 등 해방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했다.

대구고보시절의 백기만. 그는 16세의 나이에 현진건, 이상화, 이상백과 『거화』라는 프린트판 시동인지를 찍었다.
대구고보시절의 백기만. 그는 16세의 나이에 현진건, 이상화, 이상백과 『거화』라는 프린트판 시동인지를 찍었다. / 사진제공=백기만 시인 유족

일생 시를 위해 살아온 그는 문학운동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시집은 한 권도 내지 않았다. 그는 이상화가 죽은 뒤에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尙火詩碑)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고,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하여 『상화와 고월』을 간행하는 등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향토 시인들을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의 핍박과 해방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갖은 수난을 겪으며 고뇌에 찬 세월을 살았던 백기만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만큼 다재다능한 천재성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와 어울렸던 사람들은 모두가 천재였다. 그의 향우(鄕友) 현진건ㆍ이상화ㆍ이장희ㆍ이육사 등이 그러하였고 ‘금성’ 동인이었던 양주동ㆍ김동환 등과 박종화ㆍ오상순 등 주옥같은 이름들이 모두 그와 재능을 다투었던 문우들이었다. 시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의 시를 한 편만 읽어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 이를, 그 이를 보았어요. / 흰옷입고 초록띠 드리운 성자(聖者)같은 그 이를 보았어요. / 그 흰옷과 초록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알으시리이까? / 오날도 은행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 고양이는 나무가리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바람처럼 괴롭습니다.” -백기만 시인의 대표작 「은행나무 그늘」부분

☞☞☞백기만 시인의 대표작 「은행나무 그늘」 시낭송 듣기 클릭

그는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다녔다. 1920∼25년 사이에 문단에 등장하여 ‘개벽’ ‘금성(金星)’을 통해 열정적으로 시를 발표한 순정비분파(純情悲憤派)의 시인이었다. 1946년 ‘대구시보’ 주필을 거쳐 1951년 ‘경북문학가협회’를 결성하였고, 1956년 ‘대구시민의 노래’를 작사했다.

☞☞☞백기만 시인이 작사한 <대구시민의 노래> 듣기 가사 악보 보기 클릭!

전생애를 문학과 예술에 바쳐 살아온 그가 저항시인으로서 분명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흔한 문학상 하나 수상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긴 후배 시인들이 ‘금성동인회고시화전’ 을 대구 동성로 은다방에서 열어주었다. 시화전 마지막 날에는 시화판매 이익금으로 ‘연차적인 행사인 경북문화상마저 외면당한 시집 한 권 없는 항일민족시인 목우(牧牛)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금메달과 백미 한 가마를 전달하고 이때 참석한 음악가 권태호 씨가 독특한 바리톤 음성으로 ‘메기의 추억’을 불러 장내에 슬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것이 세칭 ‘대구시민문화상’ 시상식이었다.

백기만은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69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고시집 한 권조차 엮어지지 않고 있다.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과 헌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변변하게 이루어진 것이 없는 형편이다. 시전문지 ‘금성’ 창간을 주도하며, 1920년대 한국 근대시의 서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시인 백기만이 한국 문단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볼 때,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자책이 들어 대구지역 문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기리는 후배 문인들의 뜻에 의해 1991년 7월 15일 두류공원에 ‘목우 백기만 시비’가 세워졌다. 또한 대구문학관에 가면 백기만의 문학세계와 업적을 기리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어느 해인가 대구문학관에서 ‘문화분권포럼’ 을 열고 김용락 시인의 발제로 백기만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앞으로 대구문학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져 백기만이 이 땅에 뿌린 씨앗들이 꽃으로 피어나고 실한 열매로 맺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항일민족시인 백기만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