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5, 「시와 해방」동인과 천병석 시인 이야기

새를 날리면

밤에 붕대를 풀고 일어난 꽃처럼

어디로 가서

새가 되나

1985년 10월에 출간된 『시와 해방』(청하)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에 실린 천병석 시인의 작품 ‘여름’이라는 제목의 시 전문이다. 이 시는 아마도 내가 본 천병석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가 아닌가 싶다. 천 시인은 주로 호흡이 긴 시를 쓴다. 한 쪽 짜리 시로 끝내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서너 쪽 분량의 긴 호흡의 시를 쓴다.

​1985년 10월에 출간된 『시와 해방』(청하)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1985년 10월에 출간된 『시와 해방』(청하)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 표지/ⓒ박상봉 기자​
​1985년 10월에 출간된 『시와 해방』(청하)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1985년 10월에 출간된 『시와 해방』(청하)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 표지/ⓒ박상봉

그의 시는 실험성이 두드러져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천 시인의 시세계는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헛된 욕망과 무의미 하게 떠도는 공허한 존재성에 주목한다. 그의 시 ‘토요일 오후’를 보면 “토요일에 당신들은 귀가 할 수 없고/ 토요일에 당신의 성교는 거부될 것이다. /토요일에 우리는 시집을 펼칠 수 없고/ 토요일에 우리의 입술 더 이상 벌려지지 않고...”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뭔가에 고문당하며 뭔가에 공포를 느끼고 불안에 떤다.

천 시인은 ‘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지도 모르고’라는 시에서도 “폭포 위에도 꽃은 피는 것일까/ 해가 지는 날/부끄러운 힘으로, 물들을 역류시키는 / 비장한 각오의 그 시간에/ 물레방아는 도는 것일까”라며 불안한 마음과 절망의 인식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부조리를 분석하고 우리 사는 세상의 모순구조를 드러낸다.

부조리를 근간으로 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내용의 부조리함뿐 아니라 형식의 부조리함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하드록과 헤비메탈 계열의 음악을 연상시킨다. 시의 문장에 자주 등장하는 서술의 반복과 역동적 리듬감은 1970년대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큰 영향력을 끼친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노래와 닮았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천병석 시인은 계명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배재대 석사과정을 다녔다. 대학 재학시절인 1983년 「시와 해방」 1집에 시 ‘LPG 충전소’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진엽·조기현·김광현·서계인 등 청년시인들로 구성된 「시와 해방」 동인 활동을 같이하며 80년대 시단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 무렵 우리들의 고민은 삶의 우울한 지평 위에 방법적으로 던져져 있는 자기 존재에의 물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혹을 우리는 1983년 제1집 「시와 해방」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해명해 보고자 했으며, 그것을 또한 자기 존재의 상승적 지평 위에서 더욱 투명한 빛으로 분광해 보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동안의 오랜 침묵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살아 뜀뛰는 의식활동의 생명력에 힘입어 끊임없이 자기 변화에의 의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까닭에 우리들의 의식활동은 언제나 규범적·평균적 감정을 부단히 지양함으로써, 삶의 참된 의미를 인간조건의 변화 또는 영원한 에이도스의 추구라는 절대적 실재성 가운데 정초해 두기를 원했다.”

「시와 해방」 동인지 2집 ‘모르고,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는다’ 프롤로그에 이와 같이 적시한 동인들의 각오를 바탕으로 「시와 해방」은 80년대 문학의 지평 위에 다소 거칠었지만 힘차고 당당한 발자취를 남겼다. 천 시인은 대학시절 교내 문학동아리 ‘노천문학’에도 관여해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고, 이동엽·장정일·노태맹 등 빼어난 시인들과 교유 관계가 깊었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천병석 시인은 이진엽·조기현·김광현·서계인 등 청년시인들과 「시와 해방」 동인 활동을 같이하며 80년대 시단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박상봉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천병석 시인은 이진엽·조기현·김광현·서계인 등 청년시인들과 「시와 해방」 동인 활동을 같이하며 80년대 시단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박상봉

남다른 재주가 넘쳤던 천 시인은 건강보험공단에 입사했다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이직해 근무하는 등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문단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언어전쟁’ 등 한국어기원 연구서를 다수 발간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첫 시집도 내지 못했다.

그런 천병석 시인의 신작시를 최근에 대구에서 발행하는 종합 문학계간지 「사람의 문학」 여름호에서 만났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고/어떤 책의 표지가 내게 묻고 있는 사이//배추밭이 엎어진다./고추밭인 채로 파헤쳐진다.//외력에 의한 것인지 /내폭에 의한 것인지/검찰이 조사를 해보겠단다.//맑은 바람이 스치던 밭머리/마음 좋은 스님처럼 서 있는 돌배나무도/엎어진 밭을 보고 충격에 쌓인다.//어디서, 어디로 가는가?/일생으로 내려가 답을 찾는 사람/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는 칠흑 같은 밤/ 혹시 돌아오는 길마저 놓치진 않을까/불안이 언제 불안에 그치기만 하였나!//생으로 내려가는 길 층층이 박힌 쇠못들/어디로 가는지/어디든 가는 길이 있을 거야,/어디로 오기 전부터/어디로 가기 전부터/온전한 사념과 온전한 일꾼이었던 것 마냥/꿈을 다 이룬 꿈처럼 더욱 파 내려 간다.//어제 만난 밭은 따뜻하다, 따스한 밭을 껴안고 까닭 없이 운다. 울지 마라. 지금 검찰이 조사 중이란다. 토닥이는 어깨 너머, 밭둑 위의 돌배나무는 또 누가 베어갔나? / 벌어진 입 다물지 못한 입 속으로 다시 칠흑 간은 밤이 뿌리째 쏟아져 내린다. // -천병석 시인의 시 ‘돌배나무를 누가 베어갔나!’(「사람의 문학」 2020 여름호)

예전에 보았던 천병석 시인의 필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좋은 시를 대하고 보니 그가 펜을 놓치지 않고 혼자서 알게 모르게 시를 써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오래 쉬었던 만큼 앞으로 더욱 치열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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