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CBS 뉴스쇼의 ‘이한영 죽이기’ ④

“이한영 사건 북 소행이요.” ... ‘간첩의 자백’(?)

그렇게 사건을 미궁으로 몰아넣은 뒤 연말 쯤 ‘간첩의 자백’으로 이한영 피살 사건은 ‘북괴의 소행’으로 정리된다. 안기부가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을 잡아, 이들로부터 고영복(高永福, 69)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포함된 대형 간첩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최-정 부부가 이한영 사건의 배후를 자백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CBS 뉴스쇼도 “이한영을 살해한 범인들이 밝혀졌다”고 떠벌렸다.

『(앵커 : 범인들은 그 길로 달아나서 결국 못 잡은 거예요?) 대기하던 차량을 타고 고속도로를 통해 남해안으로 갔고 공작용 잠수함 타고 북으로 복귀했습니다. 이후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이건 나중에 밝혀진 거고, ... (앵커 : 그러면,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이라는 건 나중에 어떻게 확인된 건가요?) 사건 발생 후 경찰 등 수사기관이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는데요. 97년 10월에 체포된 또 다른 공작원 최정남과 강현정이 이한영 사건의 범인은 남파공작원 최순호라고 밝혔습니다. 또 그 전에 체포된 간첩들을 통해서 최순호와 함께 한 윤동철의 존재도 밝혀졌고요. (앵커 : 실명까지 나왔군요.) 네, 그래서 안기부는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전문요원에 의해 이한영이 살해되었다고 공식 발표했죠.』(CBS 뉴스쇼)

안기부가 ‘순호조’ 운운한 것은 사실이다.

[이한영 씨는 북한에서 남파된 2인조 특수공작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안기부는 20일 “간첩 최정남이 조사 과정에서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전문요원인 최순호와 20대 남자 1명 등으로 구성된 ‘순호조’가 이 씨 피살 1개월 전 남파돼 이 씨를 추적, 살해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최는 “순호조는 북한으로 귀환한 뒤 영웅칭호를 받고 재남파에 대비, 얼굴 성형수술까지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안기부는 밝혔다.](「이한영 씨 살해, 북 공작조 소행 - 최정남 진술」<동아일보> 1997.11.21)

안기부가 이렇게 발표하면 그 발표 내용도 사실인가? 이 나라 분단의 역사는 특무대와 치안본부,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국군기무사령부와 정보사령부 등이 조작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도덕한 국내외 권력에 빌붙어 숱한 국가범죄를 자행한 집단이 김신조와 김현희 등을 내세워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언론이 이를 퍼 나르고 학자 부류가 이를 정리하면 그것이 남북관계사가 됐다. 안기부(국정원) 등이 제공했을 허접한 자료를 주워 모으다 보면 저절로 안기부(국정원) 빨대가 되는 것이다.

안기부의 이런 발표를 조목조목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발표 내용 가운데 믿을 만한 구석이 없다. 우선, 고영복 교수에 대한 ‘간첩 혐의’ 및 ‘간첩 방조 혐의’는 모두 기각되고 국정원이 지금까지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국보법 위반(회합.통신) 혐의만 적용됐다(1년 3개월 복역, 1999년 2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 그러면 ‘부부간첩’의 정체와 안기부가 말하는 ‘부부간첩의 진술’을 의심해야 하지 않은가.

또 ‘간첩을 잡아 미제 사건을 해결한다’는 안기부 각본의 데자뷔가 있다. 1983년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때다. 버마가 전두환 정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간수사 발표(1983.10.17)에서 “코리언이 범인”(남한인지 북한인지 불명)이라고 발표하자 ‘대통령(전두환)이 간첩을 잡아 자백을 받으라’ 해서 두 달 뒤 간첩을 잡아 ‘아웅산 테러는 북괴의 짓이 맞수다!’라는 자백을 받았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졸저 <1983 버마>(박종철출판사, 2017) / 유튜브「[초하사랑방 대담] 전두환 정권 국가조작테러 4건, 그 진상을 밝힌다」(2020.6.20)
다음은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의 정체. 남한 내 통일운동단체 관계자를 포섭하려 내려왔다는 ‘북괴 간첩’이라지만 도대체 ‘간첩’ 같지 않았다. 몇 년 전 통합진보당 해체를 위해 국정원이 심은 프락치와 비슷한 존재(들)이었거나, 탈북자를 데려다 사건을 조작하지 않았을까. 이들이 ‘간첩’이라며 안기부가 떠벌린 이야기를 믿기 위해서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수준의 내공이 필요하다.

[최정남.강연정 간첩 부부 사건의 수사발표문을 잘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에서도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남쪽 사람에게 접근하며 만나자마자 “북에서 온 사람”이라고 밝히는가 하면, 신분 노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얼굴 사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더기로 찍어가지고 있다가 체포됐기 때문이다. ... 최정남은 이번에 재야인사 정 아무개씨에게 접근하며 노골적으로 신분을 밝히고 “... 만나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며] ... 다방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최는 “우리는 북에서 왔다. 장군님께서 정 선생의 글을 읽고 이남에도 이런 훌륭한 사람이 있나 하고 칭찬하시면서, 격려해주라고 해서 찾아왔다”고 말한다. 황당할 정도다.](<한겨레신문> 1997.11.24)

이들이 간첩 맞나? 관악산에 올라가 버젓이 사진을 남김으로써, 안기부가 누군가를 간첩으로 만들기 매우 쉽도록 하는 친절한 배려!

[이들은 스파이들의 절대금기 사항이라 할 수 있는 사진에 대해서도 대단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신분 노출에 치명적일 수 있는 얼굴 사진을 각자 또는 간첩단 여럿이 함께 찍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안기부에 압수된 물품 가운데는 △간첩 강연정이 심정웅을 10월 25일 관악산에서 만나 찍은 사진 △최정남이 역시 같은 자리에서 심정웅과 찍은 사진 등 두 사람끼리 찍은 사진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강연정이 울산 태화사지 부도 안내판 앞에서 찍은 사진, 불국사 경내에서 찍은 사진 △최정남이 여의도 둔치에서 쌍둥이빌딩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등도 압수했다. 왜 이들 간첩이 사진에 대해 이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검찰의 관계자는 북한 관료사회의 경직성과 대남공작기구들 사이의 실적 부풀리기 경쟁도 이런 오판을 낳고 있다고[?] 풀이했다.](<한겨레신문> 1997.11.24)

이들의 체포 자체가 웃음거리였다. ‘재야인사 정 아무개 씨’는 이들의 수작을 안기부의 공작으로 보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기자회견을 했다. 정보기관이 프락치를 보내 자신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려 한다고. 그랬는데도 ‘장군님께서 보내신 부부간첩’(?)은 다시 정 씨를 만나려다 안기부에 체포됐다. 너무 웃기지 않나. 이들의 정체에 대한 세간의 의혹 때문이었을까, 안기부는 ‘설명 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내용은 허접했다.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은 남파 전 10여 년 간 ‘이남화 교육’을 받고 특수공작원 훈련까지 마쳤지만 남한에서 전국을 돌며 현지 적용을 하던 2달 간 남한 사정을 잘 몰라 여러 차례 ‘실수’를 ... 안기부가 27일 밝힌 그들의 행적 중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자살한 강[연정]이 1회용 아기 기저귀를 생리대로 착각했다는 사실 ...강은 또 서울 구로동에 월세집을 마련한 뒤 남대문 시장에서 모형만 보고 비키니 옷장을 구입했으나 간단한 설치법을 몰라 환불하러 갔다가 상점 주인으로부터 면박을 당하기도 ... 이들 부부는 이런 실수 때문에 간첩답지 않게 종종 부부싸움을 했다고 ... 최는 또 분식집에서 메밀국수를 먹으면서 면을 찍어 먹도록 한 간장소스를 면다발 위에 붓다가 소스가 넘치는 바람에 바지를 적시는 낭패를 겪기도 ... ](「부부간첩 남한 행적 ‘실수 연발’」<경향신문> 1997.11.28)
 
‘부부간첩’이 ‘남한 실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포섭 상대가 서울에서 공개 기자회견까지 했는데도 다시 그에게 접근할 정도로 남한 정보에 너∼무 어두워서 체포됐노라’고 주장하기 위한 허접한 해설!

속이 빤히 보이는 이야기 아닌가. 안기부는 필시 대통령 선거 시기에 맞춰 또 한 번 그럴싸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 했을 것이다. 2년 전 ‘부여간첩 공작’에 이어서. ‘통일운동 진영의 간부가 간첩에 포섭됐다’는 각본이었을 것이다. 그 포섭 대상이 공개 기자회견을 했다면 빨리 작업을 중단했어야 했지만 그대로 밀고 나간 것이다. ‘기자회견 사실을 모른 채 다시 접근했다고 하자’면서 ... 정 모 씨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통일운동 진영을 치지는 못했지만 ‘부부간첩 사건’ 시나리오는 건졌으니 안기부는 반타작은 했다! <계속>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