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감계(鑑戒)(3)

역사(歷史)란 무엇일까요? 역사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 또는 그 기록을 말합니다. 초, 중고교 시절 저는 그래도 역사공부를 꽤 잘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부터 아예 우리나라 역사를 외면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 따로 역사공부를 새로 할 수는 없고, 마침 ‘서울대 명예교수 허성도’님이 《역사의 감계(鑑戒)》라는 글을 보내주셔서, 이 글을 몇 4회에 걸쳐 올려 새삼 역사공부를 해 보고 싶네요.

<감계(鑑戒)>라는 말의 뜻은 ‘지나간 잘못을 거울삼아 경계하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우리나라의 영욕(榮辱)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앞날을 경계해 보면 어떨까요? 어제에 이은 세 번째 <역사의 감계>입니다.

【공식 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적혀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 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인조(仁祖)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양을 보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다.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史草)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하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엔 금속 활자본을 만들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인가,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인가? 쓰는 게 경제적이다.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다. 글자 하나 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 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6,400만자다.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든다.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이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다.】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나 자랑 스러운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조금은 맛 볼 수 있지 않았나요? 우리 초, 중등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또 다음 회를 기다려 보면 어떨 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3월 2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키워드
#사관 #사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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