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윤회(生死輪回)라는 말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가(佛家) 사상이지요. 또는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을 이릅니다.

오래전, 1997년 KBS에서 방영했던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의 전통’이라는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인도 ‘록파 족’의 낯선 문화에 대한 프로였지요.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자동차로 꼬박 나흘을 달려 찾아간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자동차 길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 5,360m의 ‘타그랑 고개’였습니다. 지대가 너무 높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갈색의 민둥산이 까마득하게 이어집니다.

산소가 적어 보통 사람은 숨쉬기조차 힘든 언덕 너머엔 2,000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록파 족’이 살고 있지요. 구름마저도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영하 40도의 맵찬 날씨를 견디도록 집은 돌로 쌓았는데, ‘록파 족’은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까지만 이곳에서 생활합니다.

나머지 반년은 보름에 한 번 씩 자그마치 열 두 번이나 가축들을 몰고 풀을 찾아 여기저기 떠돕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그들, 의식주 모두가 열악하기 짝이 없지요. 백 여 마리의 양과 염소에 한 가족의 생계가 매달린 그들에게 혼인으로 인한 형제들의 재산 분할이 불가능 하자, 일처형제혼(一妻兄弟婚) 등, 일처다부제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하지만, 그곳의 특이한 결혼풍습보다는 어느 노인의 죽음 의식과 거기에 깃든 그들의 생사 관에 더 큰 관심이 쏠렸지요. 3월 말, 봄이 되면 그들은 가축의 방목을 위해 겨울을 보낸 돌 집을 나섭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보름 남짓 머물면 풀이 바닥나 새로운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납니다.

남자들은 이삿짐을 싸고, 여자는 가는 도중 먹을 음식을 마련하지요. 시아버지인 일흔여덟 살의 노인은 성치 못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시무룩해 하고 있었습니다. 물이 있는 다음 정착지 까지는 대략 40에서 80km, 움직임이 더딘 고산 지대에서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은, 오늘 가족과 함께 떠나지 못합니다. 이젠 너무 늙어 며칠 씩 걷기에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지요.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평한 자연의 순리 아닌가요?

자식들은 노인을 위해 혼자 지낼 텐트와 두툼한 옷을 준비합니다. 버터 차와 밀가루 빵 등, 한 달 치 식량을 남겨두고 떠나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노인이 살아 있으면 또 한 달 치를 마련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한 달을 넘겨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닙니다. 이 고독한 죽음 의식은 노인과 가족 간의 타협이 아닙니다. 힘든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고산 지대의 오랜 풍습으로, 노인 스스로 결정과 가족들의 수긍이 만든 고립이고 헤어짐이지요.

손자에게 마지막 차를 대접 받는 노인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아들과 손자는 울음을 삼킵니다. 정든 가족과의 이별을 두고 열여덟 살의 손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쉰 두 살의 아들도 걸음이 휘청 거립니다.

새로운 생을 받기 위해 몸을 바꾸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극진한 신앙도 이 순간엔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긴 인연에 비해 짧은 이별’, 노인은 모든 걸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나도 27년 전에 아버지를 이렇게 했다. 자식들을 탓하지 않는다. 행복하기만 빌 뿐이다.”라고 노인은 담담히 '마니차'를 돌리며 허공을 바라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삶의 끝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문턱이 아니라, 이번 생과 맞닿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매듭이고 통로입니다.

늙고 병든 몸에서 벗어나 스스로 평온을 찾아가는 구도(求道)의 길이고, 일상 수행이 일러준 혼자만의 여행이지요. 가축들을 앞세우고 멀어져 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은 자리에 눕습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습니다. 몸을 티베트 말로 ‘루’라고 하는데, 이 말은 ‘두고 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신에 대한 겸손을 배워왔을 노인, 원망이나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영혼은 몸뚱이를 남겨둔 채,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요? 이마 위로 테 굵은 안경이 벗겨지고, 손톱 밑이 까만 그의 손이 맥 없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죽음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까닭은 단 하나,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지요.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그것은 끝이 없다.’라고 그들의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배워라. 그래야만 삶을 배울 것이다.’

김덕권 칼럼니스트
김덕권 칼럼니스트

어떻습니까? 생사는 끝없이 윤회합니다. 저도 살 만큼 살았습니다. 잘 걷지도 못합니다. 이제 갈 때가 머지않았을 겁니다. 우리 남은 생 부지런히 죽음을 연마하고, 작은 공덕이라도 쌓아 내생을 겸허(謙虛)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5월 12일

덕 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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