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시(詩)에 <고의(古意>라는 시가 있습니다. 요즘 언론 보도에 보듯이, 여야(與野)가 파당(派黨)을 지어 연일 싸우지 않는 날이 없는 현실이 우리를 여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한시(漢詩) ‘고의(古意)’가 어쩌면 현재 우리 정치 현실이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에 여념이 없던 그 시절과 똑같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한강 물은 쉬지 않고 흐르고/ 삼각산은 끝이 없이 높은데/ 강산이 바뀌고 변해도/ 당파 짓는 무리 들 깨부술 날이 없으니/ 간사한 무리 들 없어질 날 없네./ 한 사람이 모함 (중상모략)을 하면/ 여러 입들이 너도나도 전파하여/ 간사한 말들이 기승을 부리니 정직한 자는 어디에 발 붙일 것인가.

봉황(鳳凰)은 원래 깃털이 약해 가시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고 싶네./ 방랑이 좋아서는 아니로되/ 더 있어야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고/ 대궐 문은 포악한 자가 지키고 있으니/ 무슨 수로 나의 충정(忠情) 아뢰리./ 옛 성인 훌륭한 말씀에/ 향원(鄕愿)은 덕(德)의 적(賊)이라고 했지.』

이 시는 당파 싸움 따위야 생각할 수도 없이 어질고 착한 사람들만이 모여 살던 옛 세상이 너무 그리워서, 시의 제목을 ‘옛 뜻(古意)’이라 붙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직한 신하보다 간사한 신하가 득세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시이지요.

실제로 당파 싸움에 희생되어 18년의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은, 간신(奸臣)들의 비방(誹謗)을 못 견뎌 벼슬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고자 했는데,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자연과 중상모략(中傷謀略)만 일삼는 무리에 대비를 통해 부정적 사회상을 비판했습니다.

이 시는 “강산도 바뀌건 만 왜 인간의 못된 짓은 바뀔 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당파 싸움만 하느냐”며 탄식하면서 귀양살이 가기 직전에 다산이 지은 시인데, 마치 200 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왜 예나 오늘이나 이런 당파싸움만 치열하게 난무(亂舞)할까요? 아마 한마디로 정치는 <협치(協治)>인데, 이것이 단절된 탓이 아닐까요?

「협치란 지역 사회에서 국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공 조직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 행정 적 권한을 행사하는 국정 관리 체계. 행정 서비스 공급 체계의 복합적 기능에 중점을 두는 포괄적인 개념이다.」라고 사전에 쓰여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어지럽히는 정쟁(政爭)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탓일 것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으로만 가득 차 있으니 협상과 양보가 비집고 들어설 구석이 없지요. 상대방은 제거 대상일 뿐이 아닌가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대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대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권 당의 정치력 부재와 제 1 야당의 입법 독주는 무엇보다 국민의 정치 불신을 더욱 키웠습니다. 해임 건의 안과 탄핵 소 추 안도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정치권에 몰아닥친 후폭풍이 급기야 민생마저 실종 시킨다는 점입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9월 27일 기각되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당 대표 구속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한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파면을 요구하며 폭풍 전야의 분위기로 휘몰아쳐 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협치’로 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야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양도 다르고, 피부 빛깔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이걸 먼저 인정을 해야 합니다.

둘째, 이해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대통령으로서는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야당 처지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게 이해입니다. 이것은 그게 옳다 든 지, 내가 동조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그 측면에서 볼 때는, 그 사람은 생각을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를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현상이 생기냐 하면, 분노라 든 지, 답답함이라 든 지, 짜증이라 든 지, 이런 거는 일어나지 않지요.

동조한다는 얘긴 전혀 아닙니다. 다른데 뭐 동조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내가 평정 심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어떻게 일하느냐, 선택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같이 하겠느냐? 다르니까 따로따로 하겠느냐? 사람이 식성이 서로 다르면 같은 밥을 먹으면서 싱거운 사람이 짠맛에 맞추겠냐? 짜게 먹는 사람이 싱거운 사람에 맞추겠냐? 반반 섞겠느냐? 이것이 선택입니다.

어제 10월 11일 치러진 강서구청장 선거를 기해 양 당의 협치를 보여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양 당이 문제를 풀면, 오히려 화평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고 여야가 협치로 나라를 안정 시키게 되지 않을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10월 12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