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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번(曾國藩), 학문과 교양 · 일 처리 능력을 겸비한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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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번(曾國藩), 학문과 교양 · 일 처리 능력을 겸비한 정치가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54) 자신과 타인을 성공으로 이끌다.
  •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 승인 2021.03.2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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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과 장개석 정치적 행보가 매우 다른 두 사람도 그를 존경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때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증국번(曾國藩-1811~1872)은 대단히 신기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성상(聖相)이라 일컫기도 하고 원흉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의 인격이 갖는 양면성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를 칭찬하자면 성인에 가까운 재상이라 할 수 있고, 비난하자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기 때문에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건 간에 그는 근대 이후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아왔다. 물론 이러한 추앙은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능력과 처세의 책략에 집중되어 있다.

모택동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도 무수히 많고 훌륭한 사상과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사람은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며 학자)과 청나라의 증국번 두 사람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개석도 “천자의 정기를 배양하고, 고금의 완벽한 인물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완벽한 인물’이란 바로 증국번을 가리킨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가 가장 성공한 부분은 자신이 성공함으로써 남도 성공하게 하고 자신이 발전함으로써 남도 발전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계초(梁啓超-청말 중하민국 초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도 세상사에 무관심했지만, 증국번이 살아 있었다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도 남았을 인물이라며 그를 높이 칭송했다. 이 밖에도 증국번을 숭배했던 인물들로 그의 제자였던 이홍장(李鴻章-청말의 정치가 증국번의 막료였다.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서구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는 정책을 취했다)과 양무운동(洋務運動-19세기 후반 군사, 과학 통신 등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개혁 운동으로, 이를 통해 봉건체제를 유지 보강하려고 했던 청국 정부의 자강(自强)운동을 말한다)의 주요 인물이었던 장지동(張之洞), 군벌 원세개(袁世凱), 신문학운동의 기수 진독수(陳獨秀) 등을 들 수 있다.

증국번(曾國藩)의 초상화/ⓒ네이버 지식백과 캡쳐

증국번이 이처럼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허(虛)’와 ‘실(實)’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증국번은 경독(耕讀)을 함께했던 인물로 학자와 재상의 자질을 겸비한 전형적인 예이다. 경독을 겸비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이상적인 치가 사상으로 ‘경’이 곧 근본이므로 ‘경’이 없다는 것은 근본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경’만 있고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높일 방법이 없다면 발전의 길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독’이 중국인의 자아 향상과 자기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자 방식이었다.

증국번은 농민 출신으로 평생을 ‘경’을 근본으로 가족들을 다스렸고 농사를 떠난 관료의 길을 거부했다

중국 지식인의 이상은 제왕의 스승이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발 물러선 차선책은 ‘문무를 익혀 제왕처럼 사는 것’이었다. 또 중국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세상사를 널리 통찰하는 것이 모두 학문이고, 인정에 통달하는 것이 바로 문학(世事通明皆學問 人情練達卽文學)”이라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 독서를 위한 독서나 학문을 위한 학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증국번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이른바 ‘성상’으로서 천하를 경영하고 중국 동남방을 평정한 바 있지만, 또 한편으로 경학의 대가로서, 동성파(桐城派-청나라 중기 이후 주류를 이루었던 신문파. 안휘성 동성현(桐城縣) 출신의 방포(方苞)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고문(古文)을 본받을 것을 제창한 뒤, 같은 동성현에서 유대괴(劉大櫆)와 요내(姚鼐) 등 2가가 나왔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고문(古文)의 마지막 대표자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학자와 성상, 제왕의 스승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지식인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한 셈이었다.
둘째, 근대 이래로 계속되는 증국번에 대한 추앙을 ‘실’의 관점에서 분석해보자면 “세상사를 널리 통찰하는 것이 모두 학문이고, 인정에 통달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취지에 기인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모택동이 말한 것처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일 처리 능력을 겸비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지식인의 마음속에 전통적으로 내재해 있던 명리(名利)의 관념인 것이다.

셋째, 증국번은 일평생을 엄청난 ‘일 처리’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고, 그 대부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가운데 학술적인 내용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집안과 마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들이다. 특히 『논어 論語』를 통속적으로 해석한 『증씨 논어』는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책이다. 그가 실사구시적으로 서술한 다양한 일 처리 경험은 중국 전통 사회에서는 대단히 유용한 것이었고, 일반인들도 쉽게 배우고 실행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의 서술방식은 보통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주지 않는 매우 평이한 것이었다.

넷째, 증국번의 ‘일 처리’ 경험은 구체적으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근면성이다. 중인 신분에 불과한 그가 경학의 대가이자 산문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근면성 덕분이었다. 그는 공부도 근면하게 했고 일도 근면하게 했으며, 신체 단련에도 남달리 근면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요 며칠 잠이 그리운 걸 보니 수양이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린애처럼 잠을 좋아하는 습성을 떨쳐버리고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해야겠다. 잠이 덜 깼어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으려면 항상 어느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

그는 이처럼 자기에 대한 요구가 남달랐던 인물이다.

2, 끈기와 적응력이다. 그는 아무리 어렵고 험한 곤경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끈기 있게 버티고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칠고 힘든 환경이 범인을 영웅으로 만들고 돌을 옥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버티기만 하면 언젠가는 이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황제의 허락만 믿고 스스로 단련(團練-송대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 존재했던 지방의 지주 무장조직)이라는 민병 조직을 만들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것을 보면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그의 끈기와 의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3. 인내이다. 증국번의 참을성은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사실 인내와 끈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끈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인내를 기대하기 어렵다. 증국번에게 있어서 인내는 무조건 참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책략이었다. 평범한 민간인 출신인 그가 큰일을 이루기 위해선 수많은 곤경과 위기상황을 겪어야 했는데 이러한 어려움은 대부분 밑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내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이야기는 그의 인내의 책략을 보여준다.

1858년 4월, 증국번의 병력은 남경 바로 위에 있는 안경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남경은 태평천국의 수도였고, 안경이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에 청군의 강남대영(江南大營)은 안경을 빼앗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남경 아래에 있는 강소와 절강으로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곳이 대대로 부유한 지역이라 여러 성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증국번은 조정의 전략이 크게 잘못돼 있으며, 명령대로 실행할 경우 강남대영의 전철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실패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정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능력만 믿고 거역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정을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 조정의 전략을 따르지 않는 방법을 취했다.

1859년 6월, 증국번은 진영을 안휘성 남부의 기문으로 옮기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몇 개월 후에 동부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후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군사력의 중심은 여전히 안경을 포위 공격하는 데 두고 있었다.

4, 분배의 미덕이다. 장개석은 증국번의 가장 훌륭한 점이 바로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자신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발전시키는 것은 범상한 안목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증국번의 부하들은 대부분 하층 평민 출신이었지만 그의 계발과 격려를 받고 이홍장이나 좌종당(左宗棠)처럼 도원(道員-명나라 때 설치되고 청나라 때에 확립된 지방 관제)이나 순무(巡撫-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지방 장관) 등 일급 관원으로 출세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 그는 형식적인 권력 분배가 아니라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발전과 성장을 지원했다. 다른 사람들의 세력이 확장되고 발전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역량의 발전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은 염군(捻軍-청나라 말기 안휘성, 산동성, 강소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무장폭력집단)에게 패하면서도 이들을 공격하는 데 선봉에 설 인물로 제자인 이홍장을 추천하여 결국 큰 승리를 이끌었고, 모든 공을 이홍장에게 돌렸다.

5, 물러설 줄 아는 지혜이다. 증국번은 “공덕을 이룬 다음에는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 천하의 도리이다(攻成身退 天下地道),”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경을 공격하여 혁혁한 무공을 쌓았지만 동시에 조정으로부터 시기를 샀다. 당시의 명사였던 왕개운(王闓運)은 여러 차례 증국번을 찾아가 제왕학을 설파하면서 자립할 것을 권했지만 증국번은 완곡하게 이를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경사로 올라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상군(湘軍-청나라 말기 증국번이 편성한 군대)을 해산하고 이홍장의 회군(淮軍-청나라 말기 지방 자위를 위한 의용군)으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청을 올려 조정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에겐 일찍이 상군의 해산에 대비한 재정적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다.
이처럼 증국번은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부적절한 욕심으로 인한 근심을 피했다. 후대 사람들이 그를 그토록 추앙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어쩌면 충분히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과 능력이 갖춰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긴 세월 동안 이어졌던 갖가지 비판과 역사의 모진 비바람, 그리고 현대 중국의 온갖 정치적 동란을 겪고 났을 때, 중국인들은 증국번이란 인물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증국번은 결코 ‘지주계급의 앞잡이’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관을 그대로 간직했고 이를 행동으로 실현했던 인물이다. 서양의 저작물들이 그럴듯한 이론으로 가득 채웠지만, 실재와 동떨어진 공허한 면모를 나타내고 있을 때, 증국번의 학문은 실용과 실천으로 충만했다. 중국인들이 증국번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증국번은 당시 이미 중국 문화의 코드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모든 사고와 행위가 중국 문화의 체현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중국인의 전통적 이상을 실현한 기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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