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취재 관계로 서너 차례 대구 광역시를 방문 복싱 관계자분들을 만날 때면 난 어김 없이 이상화 선생 고택(故宅)에 들려 묵념을 올린후 행사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1901년 5월 대구 서문로에서 탄생한 이상화 선생은 대구복싱의 산파(産婆)역활을 하신 분이다. 1922년 일본 유학 시절 현지에서 체득한 복싱을 바탕으로 1934년 대구 교남학교(대륜중고)에 침략받은 민족이 주먹이라도 강해야 한다는 슬로건(Slogan)을 내 걸고 권투부 창설을 주도했다.

이상화 선생은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란 명작(名作)을 남긴 분이다. 인도의 타그르는 시인이었고 간디는 독립운동가였지만 이상화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이상화는 이육사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한국 국문학사에 남을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었다.

당시 이상화 선생이 몸담은 교남학교는 경영난에 빠져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경기장에서 시상식을 진행하는 이종완 심판장(좌측)
경기장에서 시상식을 진행하는 이종완 심판장(좌측)

이때 그는 무보수로 학생들에게 복싱을 가르 켰다고 전해진다. 1934년 9월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 전 조선 아마츄어 선수권대회에서 플라이급에 출전한 교남학교 신구실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 대구복싱 초창기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이학교 출신들이 대구권투 클럽을 결성 오정근 박희도 석종구 김용수 김화남 백도선 신우철등 대형복서들이 연거푸 탄생 이상화 선생의 유업을 계승한다.

1964년 5월 동경올림픽 선발전서 밴텀급의 박희도가 결승에서 정신조(석탄공사)을 차례로 꺽고 우승을 차지했고 페더급에 출전한 석종구는 황영일(군산체)과 권수복(성동중앙)을 잡고 올림픽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개월후 박희도는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정신조와 맞대결 2회 2분 20초에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며 판정승을 거두면서 5차례에 걸친 길 고긴 선발전은 일단락 되었다.

김중연 관장과 문일고 3학년 이준규 선수(우측).
김중연 관장과 문일고 3학년 이준규 선수(우측).

그러나 2개월 후 칼자루를 잡은 중앙에서 재 평가전 지시가 내려온다.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정신조 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결국 박희도는 정신조에 고배를 마시면서 출전이 좌절된다. 그 중심에는 한국복싱을 쥐락펴락한 주상점 선생이 있었다. 1926년 함흥에서 출생한 주상점은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라이트급 복서로 출전한 주상점은 1960년 로마 올림픽에 국제심판으로 참관한 이후 1972년 뮌헨 올림픽까지 한국복싱을 넘어 아시아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거물급 인물이었다.

특히 1967년 로마에서 개최된 AIBA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올림픽 경기에 LF급 신설을 강력하게 주창(主唱) 이를 관철 시킨 인물이다. 결국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신설된 LF급에 출전한 지용주는 은메달을 목에 걸어 주상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대구복싱협회 박정규 심판 위원장(중앙)
대구복싱협회 박정규 심판 위원장(중앙)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조력자 주상점 선생의 역할에 힘입어 1964년 동경올림픽에 출전한 정신조는 밴텀급 결승에서 일본의 사꾸라이에게 2회 1분18초만에 RSC로 패했다.

사꾸라이선수는 1963년 3월 일본 중앙대 일원으로 방한 한국에서 3차례 평가전을 치러 2승 1패를 기록했던 복서다. 그 유일한 1패가 박희도에게 2차례 다운을 당하고 패한 경기였다.

만일 그때 박희도가 올림픽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했다면 대구복싱의 역사는 지금보다 현저하게 변천(變遷)되어 있었을 것이다. 70년에 들어오면서 대구복싱은 박태국 강희용 신동기 백종우등 이 출현 국가대표로 활약한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박찬희와 최희용도 대구 출신이지만 이들은 유소년기에 정든 고향을 떠났다.

80 년 대에는  곽귀근. 정희조 .하종호. 김시영. 등 대구 출신 4인방이 출연 각종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하면서 국위를 선양했다.

성만기 대구 체고 복싱감독 김종주 고문(우측)
성만기 대구 체고 복싱감독 김종주 고문(우측)

1978년 제3회 터키 국제복싱대회에 LF급 국가대표로 출전한 신동기는 1979년 8월 창단된 해태제과 복싱팀에 박태국(페더급) 나경민(웰터급) 박영규(미들급)와 함께 입단 갈채를 받았다.

홍진호 장흥민 오인석 조종득 마수년 등 역대급 복서들과 자웅을 겨루면서 성장한 신동기는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25인의 명단에 발탁되어 태릉선수촌에서 입촌한다. 신동기는 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탈락하자 1984년 대구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박희도 대구복싱협회 회장 휘하에서 대구복싱협회 실무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동기 관장이 운영하는 복싱 체육관에 입관 복싱을 수련한 우동철 회원이 세월이 흘러 사업가로 자리를 잡으면서 대구복싱 협회 상임 고문에 위촉되어 이번 자리를 마련했다. 

신동기 관장 우동철 고문 최종길 전 실무 부회장(우측).
신동기 관장 우동철 고문 최종길 전 실무 부회장(우측).

우동철 고문이 주최한 이 자리엔 대구복싱 협회 회장에 취임한 서석일 회장을 비롯 최종길 김종주 고문 .대구체고 성만기 교사. 대구 복싱협회 박정규 심판장.

대구복싱 협회 윤기원 전무 등 개편된 대구복싱협회 임직원들이 모여 새롭게 출범식(出帆式)을 가진 것이다. 올해 새로 취임한 대구체고 성만기(한국체대) 교사는 90년 북경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서독 칼스루네에서 실시한 상비군 전지훈련에 권만득(동국대) 김장섭(원광대)등과 함께 웰터급에서 선발되어 참가한 복싱 유망주 출신이다.

이번 행사 에 참가한 대구복싱협회 임원중에는 현(現) 대한 복싱협회 심판 위원장인 이종완도 동석 자리를 빛내줬다. 지난해 경선을 통해 대한 복싱협회 심판장에 임명된 그는 공명정대한 포청천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동철 상임고문 신동기 관장 서석일 대구 복싱협회 회장(우측)
우동철 상임고문 신동기 관장 서석일 대구 복싱협회 회장(우측)

1957년 대구 출생의 이종완은 오정근 관장이 운영하는 대구 서부 복싱 체육관 소속의 복싱인이다. 80년 중반 지도자로 변신 당시 대구<경상공고>에 재학중인 남성희(상무)를 발탁 조련한 이종완은 억울한 판정으로 인해 복싱계에서 눈물 젖은 빵을 많이 먹은 대표적인 지도자다.

철학자 괴테는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고 갈파했듯이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그의 이력은 그가 복싱경기장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려 노력하는 원천(原泉)이란 생각이 든다  

이상화 선생 고택 앞에서 정희조 선생과 신동기 관장(우측).
이상화 선생 고택 앞에서 정희조 선생과 신동기 관장(우측).

1985년 12월 제39회 전국선수권 (밴텀급) 준결승에서 허영모(한국체대)와 맞대결한 이종완의 수제자 남성희는 2회 허영모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해 한차례 다운을 탈취하는 등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고배를 마셨다. 당시 신문에 <허영모 진땀 흘린 판정승>이란 기사가 쏟아졌다.

생전에 허영모 는 나와 대담에서 가장 힘든 상대가 <왼솝잡이 저격수> 남성희라고 회고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남성희는 돌주먹 문성길과 맞대결 1회 녹다운을 탈취하면서 RSC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2회 역전 RSC 패를 당했다.

1987년 6월 제17회 대통령배 대회에서도 남성희는 변정일에 주도권을 잡고도 판정패를 당했다. 이때 의자를 링 안으로 던지는 등 10분간 경기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페더급) 최종 결승에서도 남성희는 진명돌 (호남대 ㅡ상무) 과 대결 동점인 상태에서 종합점수에서 201ㅡ196 으로 석패 출전권을 허공에 날렸다. 본선에서 진명돌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종완 복싱협회 심판장 김재현 중앙심판 윤기원 전무(우측).
이종완 복싱협회 심판장 김재현 중앙심판 윤기원 전무(우측).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연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이종완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자신과 같은 불공정 판정에 의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정규 대구복싱 심판장도 이종완 선배님은 경기장에서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한 공정성을 염두에 두고 경기를 주시하는 분이라고 진단했다.

이종완 심판장은 나와의 대담에서 지난 4월 개최된 종별선수권 대회 63.5Kg급의 서울 문일고에 재학중인 SM 체육관 이준규 선수가 준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한 경기를 하나하나 복기(復棋)하면서 판정에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실 복싱 선수를 전문적(專門的)으로 육성하는 학교팀이 아닌 사설 체육관에서 취미로 훈련하는 일반 학생들이 대학 입학이란 중대한 타이틀이 걸린 전국 무대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는 것은 마치 군대에서 육사(陸士) 출신이 아닌 3사관학교나 학군(ROTC) 장교들이 장성(將星)에 진급하는 것 만큼 힘겹다.

군에서도 서열과 기수 출신에서 탈피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인재가 당당하게 진급(進級)에 우선권을 부여 받아야 하듯이 복싱판에서도 정당한 실력에 의해 정당한 평가를 받는 풍토를 만들겠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이런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신동기 전 대구복싱 협회 실무 부회장 동우 종합 건기 우동철 대표를 비롯 참석해주신 대구복싱협회 임직원들에게 감사의 인사 올린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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