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선 안 되는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피습됐다. ‘백주의 테러’는 이 대표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테러범의 흉기에 목덜미를 찔렸다. 경정맥이 손상된 국민은 불안에 떨고 있다. 

테러는 ‘불안 사회’에 보내는 경종이다. 불안은 증오와 혐오 정치에서 비롯된다. 테러는 왜곡된 범죄자의 공격성에서 나온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 정치권의 자성이 필요하다. 

사진: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왼쪽 목 부위에 습격을 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사진: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왼쪽 목 부위에 습격을 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수사가 진행 중이다. 수사 결과가 나오면, 피습 동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선 계획적 확신 범죄다. 살인의 고의성도 엿보인다. 그는 범행 당시 호주머니에 ‘남기는 말’이라는 장문의 ‘변명문’(범인의 표현)을 갖고 있었다.

변명문에 “4·10총선에서 누가 이기든 나라는 망한다”라고 적고 있다. 국가적 위기를 언급하고 있다. 마치 그의 사적 응징이 ‘애국심의 발로’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은 재난 혹은 재앙적 위기에서도 특정인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지 않는다. 좌절, 실패, 절망과 같은 불행한 경험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그 무엇’이 범인의 사회적 증오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식 모색은 그다음 순서이다.

가장 쉬운 방법이 특정 대상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그가 쓴 ‘남기는 말’에는 ‘문재인 정부 때 경제가 쑥대밭이 됐다’, ‘민주당이 이재명 살리기에 올인 하는 형국이 됐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대표가 표적인 된 이유다. 범인이 특정한 ‘악마’인 이 대표가 범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 경제가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기 확신이 쌓이고 쌓이면 공격성은 커진다. 난폭해진다. 극단적 경우 ‘처단’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동원한다. ‘외로운 늑대의 행동’, 그것이 바로 테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에로토마니아(집착장애)를 가진 사람이 보이는 증상이란다.

에로토마니아를 뒷받침하는 특징도 보인다. 특정한 정치 신념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인이 민주당 당원이냐, 아니면 국민의힘 당원이냐, 민주당 당원으로 위장한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범인은 2020년 국민의힘을 탈당한 지난해 3월 민주당에 입당했다.

범인이 진짜 ‘망상장애’를 가진 환자이길 바란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다. 공무원 출신이다. 퇴직 후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했다. 우리와 어울려 사는 동네의 ‘김 씨 아저씨’다.

실제로 언론보도에 따르면 ‘살인 미수범’에 관한 평판은 ‘의외’였다. “법 없이 살 사람”, “남과 부딪힐 일 없는 온화한 성격 소유자”, “동네 사람은 김 씨 부동산이 아니면 집도 내놓지 않았다”……. 결코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평판이다. 

평판은 범행 동기 파악을 위한 도구다.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평범한 우리 이웃이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 사회적 배경과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필자는 흉기 피습사건 이후 제기된 각종 유언비어와 음모론에 주목한다. ‘나무젓가락 피습’, ‘이 전 대표의 자작극’, ‘피습의 배후가 있다’, ‘범인은 태극기 집회 참석자’,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의 사주를 받았다’, ‘피습의 배후는 김건희 여사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인가 싶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 중에는 TV에서 자주 보는 정치인도 있다. 무책임한 음모론이 정치권에서 생산된다는 의심을 받기 충분하다.

음모론에서 습격자에 대한 정치적 감정이 두 갈래로 나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테러도 정치적 목적을 갖는다. 음모론도 똑같다. 반발과 동정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우리 사회가 증오와 분노의 빅텐트에 갇혀있는 듯하다. 이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우리 정치 현실을 방영하고 있다. 여야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 불신은 증오를 파고든다.

혐오는 소통과 타협을 거부한다. 남는 건 정쟁이다. 그것도 패거리로 뭉쳐서 싸운다. 원인 불명의 분노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이 맹목적으로 분출된다. 그 현장에 정치가 있다. 비타협적 인물의 등용이 그것이요,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법원이 그곳이다. 험담과 비방을 퍼붓는 대변인 논평도 그것이 아닌가. 정치혐오가 기승을 부릴수록 폭력성도 커진다.

테러는 증오와 혐오 정치가 만든 쓰레기다. 사실 증오와 혐오 정치가 양산한 사회의 갈등은 묶은 숙제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의 내적 분열이 심화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한국 정치는 아직도 2022년 대선의 연장전을 치르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심판론’이란 정국 대결 구도가 바뀐 적이 없다. 심판론의 핵심은 대적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 그것을 잘 보여준 게 이 대표의 재판이다. 윤 대통령은 확정판결 받지 않은 이 대표를 범법자 취급했다.

그를 정치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른다. 민주당은 역시 제왕적 대통령론을 내세워 비판했다. 그 도구가 ‘검찰’이었다.

윤석열 정부를 ‘검찰공화국’으로 치부했다. 강 대 강의 대결이 격화될수록 ‘제왕’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됐다. 윤 대통령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이 대표도 제왕적 야당 대표가 됐다. 특히 야당에는 ‘개딸(개혁의 딸)’이라는 팬덤 배후가 있다.

개딸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맹목적 지지와 반대’가 전부였다. 정치적 편향성에 기름을 부었다. 극단으로 치달았다. 물론 팬덤의 열렬한 지지는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극단적 행동이었다. ‘나쁜 행동’이 증오와 혐오를 구조화시켰다. 국론은 분열됐다.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했다. 

불행스럽게도 증오와 혐오 정치는 격화될 전망이다. 최고 정절의 정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총선이 90여 일 앞두고 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김건희 특검법이 다시 국회로 넘어왔다. 재판 시계도 이 대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사생결단의 대결이 불 보듯 뻔하다. 김건희 특검법의 재의와 이재명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결집하면서 적대감과 적개심을 품어낼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단순히 ‘친·반 윤석열’ ‘친·반 이재명’ 진영으로 대립하는 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증오 정치가 집단적 폭발 위험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집단 간 이해를 조정하는 데 실패한다면, 대화와 협상을 통한 갈등 관리에 나서지 않는다면, 사회분열이 폭력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더 이상 증오의 난장이 되도록 방치할 수 없다.

대화와 타협에 나서라. 감정의 정치를 지향하라. 여야 지도부는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정치를 풀어나가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2021년 1·6 의회 난입 폭동 사건이다. 폭도에 의해 미국 의회가 공격받았다. 미국 민주주의 실체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은 의회 난입자의 사회심리학적 특성을 분석했다.

왜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시민이 폭도로 돌변했는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폭동에 참여한 300여 명의 폭도 중 극히 일부만이 백인우월주의 내세운 극우 음모단체 소속이었다.

극단적 흑인 혐오론자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번듯한 직업을 갖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트럼프의 선동에 속았다고 후회했다. 특이점은 최근 재정적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소송을 당하는 등 금전적 고통을 겪은 사람이 60%에 이르렀다. 

우리 경제도 어렵다. 우리나라는 갈등 요인이 미국처럼 분산되어 있지 않다. 경제난국과 감정정치가 결합하면 그 폭발력은 상상할 수 없다. 미국 같은 불행한 사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정치권이 자성해야 한다. 변해야 한다. 역지사지하는 마음인 대체 공감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민생을 돌보는 일이다. 

김경은 칼럼니스트
김경은 칼럼니스트

대체 공감력을 발휘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정치는 왜 하는가? 이 질문에 진지한 숙고 없이는 위험에 빠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볼 수 없다.

우리 정치지도자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사랑과 포용이 넘치는 사회적 심성을 가진 미래 세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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