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불상시대
내일 모래가 음력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입니다.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어느 절을 막론하고 화려한 황금불상(黃金佛像)이 거창하게 모셔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불상의 기원은 부처님 열반(涅槃) 후 500년경 인도 간다라와 마투라 지방에서 여러 형태의 불상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서가모니 당시부터 500년 까지는 무 불상(無佛像)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사진: 네이버블러그

이러한 불상은 굽타왕조를 거치면서 서서히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파불교(部派佛敎)의 출현과 함께 불교미술도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현격한 차이와 전래(傳來) 지역의 구분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대승사상과 함께 불상의 양식도 다시 한 번 재정립되어 집니다. 그러한 경로를 거쳐 한국에도 불상이 전래되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요.

무 불상시대라 함은 부처님 열반 후 500년 동안 부처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지 않고 탑, 보리수나무, 법륜(法輪), 사자상 등으로 대신하여 나타내던 시기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전해져서인지 불상을 모셔놓고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게 된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는 진리 그 당체(當體)를 믿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한 번은 달라이 라마가 대형 사찰이 만들어진 낙성식에 초대됐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세워진 사찰이었지요.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법문(法門) 차례가 되자 그 불상을 힐끗 쳐다보고는 뼈 있는 농담으로 법문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불상이 어느 날 넘어져서 사람을 깔게 되면 ‘부처님이 사람 죽였다’ 하지 않을까요?”

이 말은 부처의 장엄(莊嚴)을 곧 신심(信心)으로 착각하는 불자(佛子)들이 세계에서 제일 큰 불상 또는 동남아에서 제일 큰 불상 등, 부처의 장엄에 목숨을 거는 것을 경계한 에피소드로 이런 불상은 한낱 우상(偶像)이라 꾸짖는 말씀이 아닌가요? 종교는 간단한 진리의 상징 정도로 장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불상이 없으니 장엄할 필요가 없고, 장엄한 불상이 없으니 불상이 넘어져서 사람을 죽일 염려는 더구나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불교에도 정법(正法)시대에는 불상이 없었습니다. 우리 원불교와 같이 진리의 표상인《일원상(一圓相)》과 비슷한 법륜을 신앙대상으로 했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은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나오신 분입니다. 진리를 대각하신 서가모니는 입멸(入滅) 후, 불상을 만들어 공양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부처님 사후 500년간 정법시대에는 무 불상 시대였든 것입니다.

500여 년이 지난 상법(像法)시대 알렉산더의 침공 이후,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로서 세상에 오셨던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부처의 모습은 사라지고 초인간적, 초자연적 존재로 불상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불상숭배는 부처님의 인격에 국한하여 후래 제자로서 그 부처님을 추모(追慕) 존숭(尊崇)하는 데에 뜻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리의 표상인《일원상》숭배는 부처님의 인격만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보다 우주 만유 전체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고 신앙하여 모든 죄 복과 고락의 근본을 우주 만유 전체 가운데에 구하게 되며, 또는 이를 직접 수행의 표본으로 하여《일원상》과 같이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자는 것이다.”라고《일원상》신앙의 의미를 말씀 하셨습니다.

종교심벌은 크기의 대소에 방점을 찍으면 안 됩니다. 작아야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크기 혹은 성장에 휘둘려 공감⦁연민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종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항상 강조하는 것도 상대방과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는 “나의 종교는 친절”이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지난해 입적(入寂)한 설악 무산 스님은 이를 더 쉽게 풀어서 “종교는 사람들 비위 맞춰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경청하고 공감하기엔 작은 크기가 좋습니다. 종교가 장엄에 눈을 팔면 달라이 라마의 말씀처럼 깔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진리 그 당체를 나타낸《일원상》의 진리는 어떤 것일까요?《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이고,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인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당체는 생사와 선악, 언어 등, 모든 분별과 생각이 끊어진 유무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유(有)도 아니며 무(無)도 아닌 진체(眞體)를 말합니다.

또 대(大)란 우주만유의 근본적인 본체 곧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말하고, 소(小)란 천차만별⦁형형색색으로 나타나 있는 현상의 차별세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대(大)라는 것은 우주의 진리, 우주의 본체, 우주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고, 소(小)라는 것은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무(有無)란 우주의 조화 또는 변화를 말합니다.

또한 진리의 신묘(神妙)한 측면을 ‘공적영지의 광명’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비어 있으나 모든 것을 신령(神靈)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적영지를 체득하는 방법이 바로 선(禪)에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그 안에서 지혜가 솟아납니다. 물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사물(事物)이 비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공적영지를 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공적한 진리는 그대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우주가 대소유무로 생성 변화하는 것이 조금도 틀림이 없어서 선악업보(善惡業報)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손바닥의 한 구슬 같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천지도 앎이 있습니다. 땅이 무정한 것 같지만 씨앗이 싹터 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광명은 조금도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광명을 믿게 되면 인과를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신앙을 하면서 저 거대하고 화려한 불상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무 불상시대 입니다. 오직 진리 당체를 믿고, 진리를 닮아가며, 진리 행을 하면, 우리는 자연 진리와 합일 되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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