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의 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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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의 해악
  • 김덕권
  • 승인 2019.04.0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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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의 해악
제가 매주 나가는 모임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언쟁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제가 그렇게 치우침은 도가 아니라고 설득을 하건만 저로서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듣다듣다 못해 어느 정도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나오곤 하지만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사이에 결국은 이념싸움으로 서로 혐오(嫌惡)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인간관계를 이어 갈 수 있을까요?

《논어(論語)》라는 고전(古典)은 읽고 또 읽어도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송(宋)나라의 정자(程子)라고 일컫는 정명도(程明道 :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논어를 읽고 난 뒤에는 곧바로 모르는 사이에 손으로는 춤을 추고 발로는 뜀질하는 사람이 있다(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者也).”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고 그 가치가 대단하게 여겼으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도『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40권의 엄청난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제자에게 권장하는 글에서 “오직 논어만은 평생토록 읽어야 한다(唯論語可以終身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논어》는 실로 대단한 책입니다.《논어》<이인(里仁) 편>에「유인자 능호인 능오인(惟仁者 能好人 能惡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라는 뜻입니다. 짤막한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참으로 크고 넓으며 무한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자(朱子 : 1130~1200)는 말합니다. “대체로 사심(私心)이 없는 뒤라야 좋아하고 싫어함이 이치에 합당하니, 정자(程子)가 말한 바의 공정(公正)함을 얻어야 함이 바로 그런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좋아하고 싫어하려면 자신의 마음에 사심이 없고 공정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다산도 “착함 좋아하기를 호색(好色)하듯이 하고, 고약한 냄새 싫어하듯이 악을 싫어한 뒤라야 자신의 인(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남의 선함과 악함에도 반드시 깊이 좋아하고 깊이 싫어하는 것이다(樂善如好好色 惡惡如惡惡臭 然後能成其仁 故於他人之善惡 亦必深好而深惡之).”라는 해석을 내렸습니다.

착함과 악함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인간의 기본 자격이 필요합니다. 사물을 바라보고 사건을 살펴보는데 사심부터 버리고, 공정한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異性)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듯 착함을 진실로 좋아해야 하고, 악취(惡臭)를 싫어하듯 악함을 미워하고 싫어할 수 있는 어진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편만을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심이 가득 차 있고, 미워하거나 싫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자신의 편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싫어하는 그런 모습이 지금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가의 아무런 기준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편 아니면 무조건 진보이거나 보수라고 여기면서 막무가내로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자기편이면 무조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심리가 가득 찬 세상이 슬픕니다. 어떤 이유로 세상이 이렇게 두 편으로 나뉘어 남의 편은 증오하고, 내 편만 한없이 좋아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요? 제발 사심을 이기고 공정성을 되찾아 이치에 합당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에 가담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리하려면 우리 [덕화만발 4대 강령] 같이 <중도(中道)⦁중화(中和)⦁중용(中庸)>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義)로운 것은 정의로워야 하고, 화합하려면 조금 부족한 듯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쓰는 것이 높은 근기(根機)입니다. 그리고 의에 화(和)가 없으면 지나치게 되고, 화는 의가 없으면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이 두 글자에 '중(中)'자를 붙이면 비로소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까요?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서 중용과 중도정치는 언제까지나 꿈으로만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한국사회의 갈등을 중도로 잘 봉합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과 혐오로 지옥생활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덕화만발의 주인은 다음 네 가지의 강령(綱領)을 지킵니다.
-.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종교⦁이념⦁정치에 편협하지 않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겠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중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우주의 진리를 대각(大覺)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와 타인의 관계 사이에 서있습니다. 이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미움, 배신과 질투 그리고 다툼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리고 때로는 알게 모르게 남의 관계 속에 끼어들어 피해를 입기도 하며 오해를 쌓기도 합니다.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중도’와 ‘긍정(肯定)’입니다. 아무리 남이 나에게 나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과 포용으로 그를 대한다면 그 역시 나를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마음과 부처를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선도 없으며 악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꾸로 선도 있으며 악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한 선과 악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인연을 엮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상 양극단의 편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무엇을 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중도입니다. 중도 행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무심으로 착함을 행하고 악함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발원(發願)이 없고, 변하고자 노력함이 없는 자는 곧 살았으되 죽은 목숨입니다. 제발 어느 모임이든지, 사회나 정치에서도 이 혐오표현의 해악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언제 어디서나 중도의 삶을 이어가면 어떨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4월 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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