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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세이] 하루 생불의 치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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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세이] 하루 생불의 치열한 삶
  • 박종형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03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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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그것이 본시 치열하다. 오죽하면 삶이란 고해라 했겠는가. 삶 중에 기업의 월급쟁이 삶만큼 치열한 게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삶은 본시 치열하다.

동토(凍土)의 지각을 뚫고 파릇파릇 솟는 여린 새싹이 시작하려는 대견한 삶의 몸짓, 옹벽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민들레가 매운 강바람에 가녀린 꽃대를 세워 기어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날려 보내고서야 끝내는 꿋꿋한 한해살이, 둠벙과 땅속에서 장장 예닐곱 해나 애벌레로 견뎌 살아남아야 우화(羽化)할 수 있는 매미들이 채 열흘도 되지 않는 짧은 일생을 온통 생식을 위해 불사르고 생을 마치는 눈물겨운 주검, 수만리 험난한 물길을 허위단심 달려와 지친 몸으로도 사력을 다해 산란을 마치고 기진해 죽는 연어들의 외경한 모정, 살갗을 에이 듯 한 엄동에도 얼음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는 청둥오리들의 고달픈 생존, 세렝게티 초원에서 당장 어제 번히 눈 뜬 채 어린 새끼를 잡아 먹혔어도 그 슬픔을 물고서라도 오늘 그 포식자들과 이웃해 풀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하는 어미 임팔라의 가긍한 목숨부지 등, 지상의 삶은 각기 그 나름대로 외경하고 치열하다.

만물의 영장이고 본시 자유인이며 하늘을 이고 도리깨질을 할 만큼 뛰어난 기상을 소유했다 하는 인간의 삶은 어떠한가. 
부처님께서는 궁문을 나와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를 짓는 농부의 고달픈 삶을 보고 인간의 삶이 고통임을 실감했으며, 산송장처럼 쇠잔한 노인의 가긍한 모습을 보고 인간의 무상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족과 왕관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함으로써 비로소 불타가 되셨다. 말하자면 석가모니는 일체의 소유와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궁을 나와 악마와의 치열한 싸움을 이겨냄으로써 부처가 되신 것이다.

기업의 월급쟁이들은 성공을 욕망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며 궁과 같은 기업이라는 성 안으로 들어가 치열한 삶을 산다. 그들이 장애와 불리와 부족함과 맞서며 생존과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벌이는 창조적 활동과 노력은 사뭇 절절하고 외경하다.

부처님께서는 스물아홉에 출궁하여 서른다섯에 득도, 불타가 되셨지만, 회사원은 기업에 자리를 잡으면 그 다섯 배도 넘는 삼사십 년을 붙박여 치열한 삶을 치러내야 평상의 삶을 지탱할 수가 있다. 누구는 그 치열함과 고달픔 때문에 ‘죽지 못해 산다.’ 하고, 누구는 그 지겨운 지루함 때문에 ‘삶의 무미건조하기가 꼭 누에가 잠실에서 허구한 날 꼬물꼬물 뽕잎 먹는 것’ 같다 한다. 

기업은 사람이 태어나서 맺고 푸는 온갖 인연 중에서 가장 질기고 사연이 많으며 애증이 짙은 운명적인 인연이다. 우리가 거기다 일생을 붙들어 매고 간절하게 보듬어 안으며 진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밥벌이가 지겹다 하면서도 어김없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대충 아침을 걸치고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게 만드는 힘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딱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이 매일 치열한 일터로 들어가면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삶의 각자(覺者)가 되어 외경한 삶의 길을 묵묵히 성도(成道)하는 것이다. 하여 나는 송구하게도 감히 하루의 삶에 구도자처럼 충실 하는 회사원들이 가상하여 저들을 ‘하루 생불(生佛)’이라 높여 부른다. 인간세상 예토(穢土)에서 하루의 삶을 외경하게 사는 게 바로 성불(成佛)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기업에서 삶의 길을 당당하고 훌륭하며 시종여일하게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 항해에는 역경과 시련과 고통과 절망과 고달픔이 격랑처럼 덮치고, 갈등과 미움과 불목과 시기와 오해와 중상모략이 영혼을 상하고 인간 사이를 벌리며,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해도 내가 마시려는 성공의 잔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은 채 무정한 세월에 나의 삶이 여위고 나의 열망이 사위어 가게만 한다.

ⓒPixabay
ⓒPixabay

일하는 보람과 짊어진 책임이 뭐라고 장장 이십 년 씩이나 가족과 떨어져 생홀아비처럼 사는 공장장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 가 상상이 가는가. 그런 치열한 삶이란 단순한 충성이나 성실함 이상이다. 신제품 개발이 시작되면 기업 연구실의 불은 열 달이고 보통 새벽 두세시까지 켜 있고, 연구원들이 연구실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게 예사며, 그들 아내들은 덩달아 생과부가 된다. 개발이란 게 마치 승전의 신탁을 위해 장수가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그토록 고통스러운 희생을 제물로 요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포식자들의 먹이가 되는 누우나 가젤은 허약하거나 추격을 따돌리지 못하는 경우이기 마련인데, 기업에서의 생존을 위한 경쟁이란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한 가족으로 일하고 살아도 병들거나 경쟁력을 상실해 쓸모가 없어지면 ‘이태백’으로 요절할 수 있고, ‘삼팔선’으로 버려질 수 있으며, ‘사오정’에 젊은 백수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런 돌연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한 결 같이 긴장해서 노력한다는 게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삶인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실감하기 어렵다.
까마득하게 치솟은 건설현장 크레인 타워의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조종실에 갇혀 온종일 크레인을 운전하는 일, 수천 도로 펄펄 끓는 용광로에서 아차 하는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한 작업을 하는 일, 염천炎天에서 쏟아지는 땡볕 아래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는 건설 노동자의 힘든 노동,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을 것 같은 혹독한 추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계를 돌리고 쇠붙이를 다뤄야 하는 작업을 상상해 보라.

부도지경에 이른 부족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간도 쓸개도 다 빼버리고 진종일 문전걸식하듯 자금 주를 찾아다니고, 긴급대출을 간청하기 위해 꼭두새벽에 결정권을 쥔 은행 부장 댁 문간에 서서 기침 하시기를 기다리는 처량한 몸부림, 회사 간부를 마치 지난날 양반가의 청지기쯤으로 여기는 사주 사모님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일파출부처럼 김장을 거들러 가는 아내를 못 본 척 해야 하는 간부의 쓰린 연민, 기분 나는 대로 휘두르는 회장님 인사권 단칼에 백수로 버림받지 않으려고 머슴이 되라면 머슴이 되고, 회사 돈을 훔치라면 장표를 조작해 비자금을 빼돌리는 하수인이 되며, 충신반열에 올릴 테니 대신 매품을 팔고 옥살이를 하라면 쇠귀신이 씌운 수의를 대신 입는 충복이 되는 정체성을 저당 잡힌 가엾은 종살이, 안팎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경야독 하느라 곤비(困憊)함이 삶의 즐거움을 파먹고 젊음을 피폐 시켜도 멈추지 말고 전진하라는 강박 등 회사원 삶의 파란만장하고 고달프며 힘든 단면을 일일이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의 나이 오십대 초반에 나선 5차 북벌(北伐)의 ‘오장원의 대치’에서 무리로 쌓인 피곤이 치명적인 사인이 되어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제갈공명이 자신의 치열했던 삶이 얼마나 허망하게 끝나는 가를 비로소 되돌아보며 “수고만 많고 거두는 것은 적은 내 삶이여!” 하고 자탄한 적이 있다. 그 무위한 회한은 인간의 삶이 치열한 만큼 그 허무한 그림자 또한 짙음을 말한 것이리라. 

기업에서의 회사원의 삶이 일생을 전장을 누비며 살다 죽은 저 제갈공명의 삶과 같아서 치열한 역정에 부침하는 희로애락마다 회한이 고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업은 태어나고 성장하며 회사원은 건강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게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다.

저들이 기업에서 치열한 삶을 거뜬하고도 훌륭한 공동선에 기여하며 이겨내고, 이겨내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깊은 상처 입지 않고 퇴직한다면, 그게 사랑을 실천하여 성불하는 것일 것이며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일 것이다.

때문에 저렇게 치열한 삶으로도 기업을 좋은 기업으로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저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며 저들을 잘도 보듬어 안고 있는 기업들을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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