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을 의심하지 않아야 ,. 화기가 응어리져 흩어지지 않느니라.

내가 남을 의심하지 않아야 남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내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고른맘으로 사람을 대하면, 남도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고른맘으로 나를 맞이하여 이쪽 정성을 저쪽에서 믿으며, 저쪽 정성을 이쪽에서 믿어, 화기가 응어리져 흩어지지 않느니라. 《참전계경(參佺戒經)》제262사(事)는 <물의(勿疑)>입니다. ‘물(勿)’이란 ‘말 물’자로 <말다. 말라. 아니다. 없다.>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의(疑)는 ’의심할 의‘자로 <의심하다. 의혹하다. 괴이하게 여기다. 두려워하다.> 등으로 쓰이지요.

그러니까 <물의(勿疑)>란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가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남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젊어서 사업을 할 때에 사람을 너무 믿어 여러 번 실패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사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치우침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면, 남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대한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쪽이 성실하면 저쪽이 믿어주고, 저쪽이 성실하면 이쪽도 믿게 되어, 온화한 기운이 엉켜서 흩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양심이 있고, 내가 양심을 따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양심을 따를 것이란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성심편(誠心編)>에도「의인물용(疑人勿用), 용인물의(用人勿疑)」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를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재를 등용할 때 사람이 의심스럽거든 쓰지 말라는 것은 인재를 잘 골라 써야 한다는 말이지요. 배신할 사람, 속일 사람으로 의심이 가면 처음부터 쓰지를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무능한 사람과 의심스러운 사람은 그 뜻이 다릅니다.

무능한 사람은 일의 성과가 적을 뿐 일을 망치거나 손해를 입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사람은 비록 유능할 지라도 손해를 입힐 사람인 것입니다. 12월 6일 우리 <덕화만발 덕인회 송년의 밤>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특히 경남 남해에서 올라오신 ‘이순신의 연인’ 운선(雲仙) 서재심 여사를 모셔 ‘이순신의 용인술’에 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순신은 그야말로 <물의(勿疑)>의 화신(化身)인 것 같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란 현명한 인물이 세상에 처함에는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 곧 그 인격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인재를 알아보는 이순신은 사람을 알아보고 발탁해 믿고 쓰기 때문에 이순신의 인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을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선조와 조정에 올리는 공문서인 장계(狀啓)와 사적 편지인 서간(書簡) 그리고 7년 동안 쓴 난중일기가 그것이지요. 이 모든 글에는 충효우제(忠孝友悌)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곧 나라가 위태로우면 나아가 싸우고, 늙으신 부모님에게 효를 행하며, 어려움을 당한 친구에게 따뜻함을 보이고, 선배의 옳은 일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의 많은 교류 가운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의 만남은 충무공(忠武公)의 삶에 굵은 획을 긋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류성룡 대감은 한양 ‘마른 내 골(乾川洞)에서 이순신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형’이었습니다. 류성룡은 이순신이 32세의 나이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함경도 변방으로만 떠도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유성룡은 원리원칙을 지키는 깐깐한 성품 탓에 늘 상관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는 이순신의 정의감과 기개를 높이 샀습니다.

어린 시절 장군에 대한 남다른 감회를 느꼈던 류성룡은 한평생 그 뒤를 돌봐준 ‘인생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1589년 왜란(倭亂)의 조짐이 보일 때, 선조는 전국 장수들 가운데 그 계급에 구애받지 말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라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의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류성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2월 이순신을 종 6품 정읍현감으로 추천한 것입니다.

이어 1591년 2월 정3품의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케 했습니다. 무려 7단계나 뛰어오르는 관직이라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류성룡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능력을 굳게 믿었습니다. 오직 현명함과 유능함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류성룡의 혜안(慧眼)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요?

임진왜란 때 육지에 류성룡이 있었다면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2월 26일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삭탈관직하고 한성으로 압송하라 명합니다.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치지 않고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무함하여 죄에 빠뜨려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 등 세 가지였습니다.

이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 1526~1605)은 이순신장군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恩人)이었습니다. “이순신은 공이 많은 장수입니다. 전시에 그를 죽인다면 앞으로 나라의 안위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또 삼도체찰사인 이원익(李元翼)과 비록 당색은 달랐지만 서인(西人) 이항복(李恒福)도 이순신의 공이 크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변호했지요. 그래서 겨우 선조의 마음을 움직여 장군은 구사일생, 망가진 몸을 이끌고 백의종군에 나섰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1591년 장군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했을 때, 77세의 무관 대선배인 정걸(丁傑)에게 참모장인 조방장(助防將)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경상우수사, 전라병마사, 전라우수사 등을 역임한 백전노장의 노하우를 활용하려는 심산이었지요.

정걸은 흔쾌히 응했습니다. 정걸은 조선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板屋船)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실력이 있으면 채용하는 장군의 창의실용정신이 빛나는 대목 아닌가요? 그리고 거북선을 만들어 낸 나대용(羅大用), 그리고 대장장이, 노비들에게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보완해 새로운 총통을 만들게 했습니다.

이러한 장군의 용인술은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는 ‘물의’의 달인(達人)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사람을 믿고 쓴 이순신의 용인술을 배우고 사람을 써 대업을 성취하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2월 1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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