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칼럼니스트

불이사상

진리공부에 성리(性理)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성품(性品)의 본래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성리는 모든 원리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본래의 진심자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는 자리이지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그 자리를 다시 밝히는 것이 바로 선(禪)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본래자리는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으며, 소리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습이 없기에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의 자리이지요. 또 이 자리는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에 깃들어있기에 불이(不二)인 것입니다.

이 ‘불이사상’을 우리 [덕화만발카페] <이언 김동수 교수 시문학>방에『다르지 않다- 불이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이언 교수님이 올려주셨습니다. 이언 김동수 교수님은 백제예술대학을 퇴임하셨고, 현재는 <미당(未堂) 문학회>장직을 맡고계신 유명한 시인이십니다.

이언 교수님과 저는 오랜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제가 오래 전 [원불교문인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 특별강연을 모신 후부터입니다. 그 인연으로 [덕화만발]카페를 시작한 때부터 7년이 넘도록 <이언 김동수 교수 시문학 방>을 굳세게 지켜 오신 고마운 분이시지요. 이 심오한 진리를 깨치신 이언 교수님의 불이의 사상을 [덕화만발]에 올려 공유하고자 합니다.

【다르지 않다-불이사상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는 말이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다. 옛날 인도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장님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말들이 오고 갔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장님이 ‘나무 기둥 같다’고 했다. 그러자 배를 만져본 장님이 ‘벽’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장님은 꼬리를 만져보고 ‘밧줄(rope) 같다고 하였다.

코끼리는 분명 하나(一)인데, 서로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모두 코끼리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다불이(一多不二)’의 모습이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이란, 이처럼 하나(一)와 여럿(多)은 둘이 아니다 라는 사상으로 이것이 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노자《도덕경》에서도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높고 낮음, 앞과 뒤, 화와 복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불경(佛經)에서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다’는 법문과 ‘고통 속에 영광이 있다’는 성경의 말씀도, 번뇌와 보리, 고통과 영광이 다르지 않는 불이 적(不二的) 관계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수증기로 기화 되어 날아가니, 세상의 모든 형상은 이처럼 있다(有)가도 없는(無)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다. 무릇 드러나 있는 모든 형상[色]에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는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세계다. 그러기에 얼음과 수증기는 물이면서도 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얼음과 수증기를 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二) ·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세계가 자연이고 우주의 본상이다.

세상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체로서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절대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일다불이’의 장엄한 화엄세계(華嚴世界) 속에서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불이사상은 주객일여(主客一如)의 세계관에 다름 아니다. 시인들이 사물을 분리하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통찰 적 심미안(審美眼)으로 그것을 유기체적 전체로 파악하고 있음도 그것이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男兒到處是故鄕)

그 누가 오래토록 객수에 젖어 있나(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큰 소리로 천지를 뒤흔드니(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사꽃 편편이 흩날리네(雪裡桃花片片紅)」

-한용운, 오도송(悟道頌) 전문-

‘객지’가 ‘고향’이고, ‘눈 속’에서 ‘복사꽃’이 편편(片片)이 난다고 한다. 전주에서 만나면 남원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만나면 전라도가 고향이지만, 외국에서 만나 서로 묻게 되면 코리아가 고향인데, 어찌 객지와 고향을 분별하고 봄과 겨울을 서로 다르다 구분하랴. 우리네 인생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이 지구라는 항성에 잠시 나타났다 지나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데 고향과 객지를 어찌 나눌 수 있으며,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이미 배아(胚芽)된 연기 체(緣起體)인데 어찌 겨울의 눈과 봄꽃을 나누어 볼 수 있겠느냐 반문하고 있다.

그러기에, 눈앞에 현존재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그것이 근원적으로 무상하고 허망한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네 삶은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없음(無)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저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라고만 간주한다면, 이 또한 허무주의에 빠져 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의 그 근원을 보면 서로 나누어져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고 서로 연기되어 있다. 다만 인(因)과 연(緣)에 따라 일시적으로 성립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너와 나, 주체와 객체, 유와 무, 생과 사의 양극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중도(中道)에서 조화와 원융(圓融)의 세계를 향하고 있음이 진정한 불이(不二)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어떻습니까? 대단한 진리를 설하지 않으셨는지요?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닙니다. 또한 동(動)과 정(定)이 둘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둘 아닌 이 문(門)에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대도를 깨쳤을 때 비로소 유와 무의 편착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과 사도 동일한 것이며, 동과 정이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래 둘이 아닌 불이사상을 체득해서 어디에 치우침이 없는 큰 공부를 하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2월 1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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