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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불자적 인간상
  • 김덕권
  • 승인 2018.01.12 08:55
  • 수정 2018.01.1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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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권 칼럼니스트

불자적 인간상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만 아닌 꼴을 보여도 즉각 “종교인이 뭐 저래”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불자의 인간상을 구현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원불교는 처음부터 이러한 사고방식에 비판의 눈을 돌렸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선과 악, 정신과 육체는 대립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여 육체의 욕망을 억압하는 정신의 순수함을 고양시킬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정신(心)과 육체(色)란 본래 개별적인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가 공(空)입니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 정신과 육체는 상호 대립하는 둘로서 존재하지만, 영원의 상태 하에서는 양자는 대립을 초월한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 정신과 육체가 본래 둘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는 양자가 서로 떨어짐이 없이 상즉(相卽) · 상입(相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선(善)이나 정신의 일변도가 아닌 선과 악, 정신과 육체의 통일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지옥계에도 불계(佛界)가 있고, 불계에도 지옥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상을 잘 나타낸 사상이 바로《화엄경(華嚴經)》입니다. 본 이름이《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부처님을 장엄한다는 뜻입니다.《화엄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경이므로 옛 부터 대승경전의 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리의 모습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일체가 되어 그 절대의 경지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자 주위의 수많은 보살들이 일어나 부처님의 한없는 공덕을 찬양함으로써 이 경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러 보살들이 등장하면서 법계의 오묘한 법을 설해갑니다.

여기서 각 보살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깨달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출현하여 53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납니다. 그가 만나는 선지식 중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나 외형적인 것보다 보리심(菩提心)을 내는 그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있어서 대승불교의 이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화엄경》사상을 잘 나타낸 말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입니다. 즉, ‘하나가 전부이며, 전부가 하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알의 쌀을 보고 사회전체, 우주전체의 일 등을 알아내라는 뜻이지요. 이 한 알의 쌀에는 그것을 생산한 자연, 농민의 땀, 먹고사는 인간의 생명 등 온갖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 모든 것이 어떤 질서에 얽매어 단위(多)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의 인간관은 ‘일 즉 다 다 즉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사회전체를 표현하고 있지요. 여기에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나 이외의 백 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 명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곧 나 자신이 백 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자적 인간상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불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합니다.

해탈과 열반은 불자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나타나는 것일까요? 열반은 반드시 해탈의 과정을 거쳐서 나타납니다. 지속적이며 충만한 기쁨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상대심이 무너졌을 때, 그를 통해 대립과 갈망이 쉬어졌을 때, 불안의 뿌리인 죽음이란 생(生)의 단절로부터 깨어났을 때, 몸과 마음이 자유로움에 도달했을 때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둘째, 불자는 사실과 진실에 바탕을 두고 살아갑니다.

모르고 믿으면 미신(迷信)입니다. 불가(佛家)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에 따라 모든 현상의 보편적 진리가 무상(無常)과 고(苦)와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셋째, 불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생활을 추구합니다.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생활이 자리이타의 정신입니다. 자신만의 열반을 추구하던 것을 비판하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의 실천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연기적 관계의 원리가 ‘동포은(同胞恩)’입니다. 이러한 동포 은을 알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욕망에 빠져들 때, 인간은 갈등과 상극의 세계, 심지어는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지요.

넷째, 불자는 ‘불생불멸’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철저히 믿습니다.

원불교에서는 머리를 쪼개서라도 이 ‘불생불멸’과 ‘인과응보’의 진리를 집어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자는 현생에도 좋고 내생에도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내생이 좋기 위해서는 이생에서도 보시공덕(布施功德)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고달픈 것은 전생에 공덕을 충분히 짓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인과응보가 아닌가요?

다섯째, 불자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치우침은 도가 아닙니다. 원융회통의 사상이 불법(佛法)입니다. 모나지 않게,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도(中道)이고, 중용(中庸)이며, 중화(中和)입니다. 이 사상이 몸에 밴 사람이 바로 원만하고 구족한 인생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불자적 인간상이요! 새 해 무술년(戊戌年)에는 이 다섯 가지의 불자적적 인간상을 갖추고 이 메마른 사회에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세상’의 구현에 앞장서는 덕화만발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의 고리를 만들어가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신앙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 갈등을 함께 승화해 모든 종교와 사상을 근본적으로 회통할 수 있는 철학을 바탕으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앞장서 실현해 가는 덕화만발 가족이 되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월 1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김덕권  http://cafe.daum.net/duksan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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