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필구(攻其必救)반드시 구해야 할 곳을 공격한다.내가 전투를 하고 싶을 때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 쌓고 참호를 깊게 파고 지키면서 싸움을 피하더라도 더불어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내가 적이 반드시 구원하러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다.(‘손자병법’ ‘허실편’.)이는 진공 작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도 원칙의 하나로, 역대 병가들이 중시해온 책략이다. 공격할 때는 적이 반드시 구원하러 나올 곳을 공격하여 적의 행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손빈(孫臏)과 전기(田忌)가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했다는
애민과 인재등용의 공정성으로 사덕(私德)과 공덕(公德)을 펼쳤다.기나긴 중국 역사에서 지금까지 쇠털처럼 많은, 관리들이 명멸했지만 약간의 흔적이라도 역사에 남긴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명재상의 반열에 오른 이는 봉황의 깃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희귀하다.그러나 중국의 역대 명재상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강직함이다. 강직한 성격이야말로 명재상이 되어 후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송나라 초기의 여몽정이 그런 명재상이었다.여몽정(呂蒙正-944~1041)은
공격하지 말아야 할 군대‘손자병법’ ‘구변편’에 나오는 자못 의미심장한 말이다. ‘적군이 있어도 공격하지 말아야 할 경우가 있다.’ 이 책략은 진공할 수 있는 적에 대해 곧장 공격하지 않고 다른 목표를 선택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전쟁에서는 충분히 공격할 수 있으나, 할 수 없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매우 많이 일어난다. 예컨대 적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갔으나 방어하는 적이 죽을힘을 다해 반항할 가능성이 있기에 잠시 공격하지 않고 적의 마음이 흩어지면 다시 공격하는 경우 등이 그렇다. 소수의 적을 만나 뒤엉키게 되면 현실적으로
청나라 4대 황제 일곱 살에 즉위, 문무를 겸비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청 왕조는 결코 중국 역사에 있어서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불운의 시대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청 왕조가 명 왕조보다 훨씬 훌륭하고 빛나는 왕조였는지도 모른다. 청 조의 여러, 황제들 가운데는 유능하고 훌륭한 황제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 강희대제(康熙大帝-1654~1722, 재위 1661~1722)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청 조에 이처럼 훌륭한 군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만청의 통치자들이 중원을
물러나는 적은 추격하지 않는다.“높은 구릉(丘陵)에 진 치고 있는 적은 쳐다보고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구릉을 등지고 있는 적은 맞서서 응전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달아나는 적은 추격하지 말아야 한다. 적의 정예병은 정면 공격을 하지 말아야 한다.”이 말은 ‘손자병법’ ‘군쟁편’에 보이는 용병 8원칙의 하나다.낚시의 미끼처럼 아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보낸 적군은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철수하는 군대는 돌아가는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적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구멍을 터놓아야 한다. 벗어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빠진
군주가 소인배(小人輩)면 간신이 발호하고 충신은 결국 죽게 된다.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황위를 이어 청 왕조를 세웠다. 황태극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뛰어난 재능과 모략을 겸비한 황제였다. 그는 잠시 영원성 대신 조선(朝鮮)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명과 청 왕조 모두 휴전하고 각자 전열을 가담을 시간이 필요했다. 명군은 성을 축조하고 병사들을 훈련 시켜야 했고, 청군은 조선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원숭환은 황태극에게 화친을 제의했고
양손으로 활을 쏜다.본래 이 말의 뜻은 무예가 높아 왼손᛫오른손 양손으로 활을 쏠 수 있다는 것이다. 원곡선(元曲選)과 백인보(白仁甫)가 쓴 ‘오동우‧계자(梧桐雨‧契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안록산이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유주(幽州) 절도사 장수규(張守珪)에 의해 장안으로 압송되어 현종 앞에서 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현종이 안록산에게 물었다.“너의 무예 솜씨는 어떠냐?”“나는 오른손과 왼손으로 활을 쏠 수 있고, 18가지 기본 무예를 못 하는 것이 없다.”이 말은 군사 계략에서 전체 국면을 살펴 여러 방향에서 적을 공격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면 간신이 득세하고 충신을 잃게 된다.명나라 숭정(崇禎) 3년(1630) 어느 날, 북경의 채소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민족의 반역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였다. 그 가운데는 ‘배신자’의 살 한 조각을 얻어 자신이 진정한 염황(炎皇-중국 고대의 불의 신인 염제(炎帝)와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皇帝)를 칭함) 자손이며 군자임을 증명하고 겁이 많은 소심증을 치료하려는 개인적인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반역자’는 죄수를 가두는 수레에 실려
이 모책(謀策)은 전략을 결정할 때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정책 결정의 기본 사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백전기법’ ‘수전(守戰)’에서 “자신을 아는 자는 지킨다. 자기에게 아직 승리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한층 굳게 지킬 것이고, 적을 이길 수 있는 이치가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을 출동시켜 공격하면 승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것과 같다.또 ‘손자병법’ ‘형편’에서는 “이길 수 없으면 지키고, 이길 수 있으면 공격하라”고 했다. 공(攻)‧수(守)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공격은 방어의 전기(轉機)며,
한 나라의 재상을 바꾸는 일은 궁중의 기둥을 바꾸는 일과 같다.관료에게는 인덕과 지위가 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 유가의 정치적 이상이다. 이런 이상이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중국 역사를 관통하며 현실 비판의 무기이자 정치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해온 것은 사실이다. 일단 현묘한 원리는 덮어두더라도 여기서 우리는 관도(官道)의 이치를 찾아볼 수는 있다.사실 관도의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죽일 수는 있지만 닭 잡는 칼로 소를 잡으려 하다간 소를 죽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칼에 사람
수비하는 것은 공격하기에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공격하는 것은 지키고도 힘이 남기 때문이다. (‘손자병법’ 형편(形篇)‘) 역시 같은 편에는 “적이 아군을 이길 수 없는 것은 아군이 수비하기 때문이며, 아군이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적에게 공격할 빈틈이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도 보인다.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려면 ‘수비’ 태세를 취해야 하고, 내가 적을 이기려면 ‘공격’ 태세를 취해야 한다. ‘수비’에 ‘공격’이 배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수비’라는 방식을 통해 ‘이길 수 없게 하는’ 조건을 창출하고, 기회를 잡아 적을
양신(良臣)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면서도 군주의 명성을 빛내고, 충신(忠臣)은 죄를 얻어 이름만 남기고 죽는다.의(義)란 무엇인가? 의는 천금과 같은 것이다.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한다 言必信行必果. 인격의 수양에 있어서 의 또는 의기(義氣)를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임이 틀림없다. 누가 뭐라 해도 신의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는 군자가 무상함을 반복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인배 보다, 낫기 때문이다.하지만 의에도 대의(大義)와 소의(小義)가 있어서 모든 일을 소의에 맞춰 추진한다면 권력의
‘금선(金蟬)’이란 여름날 나무 위에서 맴맴 울어대는 ‘매미’다. 수컷 매미의 배 부분에는 특수한 ‘울음 기관‘이 있어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매미가 성충으로 변할 때는 유충의 껍질을 벗는다. ’금선탈각‘은 매미의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자 길이다. 이 말은 ’서유기‘ 제20회에 나온다. 당나라 승려 삼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도중에 맹호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맹호는 가죽만 훌랑 벗어놓고는 삼장법사를 납치해간다. 손오공과 저팔계는 그것도 모르고 빈 껍데기뿐인 맹호를 열심히 두드렸다. 이 맹호가
큰 능력을 작게 사용하면 위태롭고 작은 능력을 크게 사용하면 좌절한다.방현령(房玄齡)은 당 태종 이세민의 개국공신이었으나, 중국 역대 재상의 계보 중에서는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고, 희곡이나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서 다뤄진 예도 거의 없다.그러나 실제로 그는 진정한 재상의 재목이었고, 역대 재상의 모범이었다. 방현령과 이세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았다. 이세민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세민도 그가 없었다면, 사서(史書)에 기록된 이세민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당 왕조의 역사는
어려우면 물러난다.‘오자병법’ ‘요적’ 제2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다음으로, 점쳐볼 것도 없이 적과의 교전을 피해야 하는 경우가 여섯 가지 있다. ‧‧‧‧‧‧이 모든 조건이 적군에 뒤떨어질 때는 생각할 것도 없이 싸움을 피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승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 진격하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면 물러나야 한다.‘좌전’(기원전 597년 선공 12년조)에는 “나아갈 만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서는 것이 군대를 제대로 다스리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난이퇴’는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곤경에 처하면 곧 후퇴하라
봉건시대 관료사회에서 오래 살아남기란 고차원의 처세술이 필요했다.풍도(馮道)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후한(後漢)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쓴 『장락노자서 長樂老自敍』는 매우 유명하다. 그것은 중국 봉건관료 사회의 몰염치한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에서 풍도는 자신의 이력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역대로 자신이 역임한 관직과 칭호를 득의양양하게 나열했다. 심지어 거란 정권이 자신에게 준 허위관직까지 포함했다. 실로 대단한 실사구시 정신이 아닐 수 없다.송대의 대문호이자 사학자, 정치가였던 구양수(歐陽修)는 『신
줄행랑이 으뜸이다.‘남사(南史)’ ‘단도제전(檀道濟傳)’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송(劉宋)의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단도제(檀道濟)가 북위(北魏) 정벌에 나섰다. 먼 길을 행군하느라 병사들은 지쳤고 식량도 제때 보급되지 않아 상당한 곤경을 치르고 있었다. 역성(歷城.-지금의 산동성 역성현)에 이르자 마침내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여기서 단도제는 모래를 가마니에 담아 식량인 것처럼, 쌓으면서 병사들로 하여 ‘양식 가마니 수를 큰 소리로 세게’ 하는 ‘창주양사(唱籌量沙)’의 계략으로 적을 속이고 무사히 귀환했다.역시
중국 역사에 영웅이나 의인들은 많지만, 기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중국 역사에는 기억할 만한 기인(奇人)들이 있었다. 기인들은 대부분 구 왕조가 쇠하고 새로운 왕조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시기에 나타나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곤 했다. 이른바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기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황량한 벌판을 누비면서 병력을 지휘하고 적을 소탕하는 장수는 영웅(英雄)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기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뛰어난 지모로 치국과 안정의 지략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현사(賢士)이지 기인은 아니다.그럼 기인이란 무엇인
‘사마법’ ‘엄위(嚴位)’ 제4에 이런 내용이 있다.어느 정도의 병력을 운용하여 이미 승리를 얻었다 해도 승리하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병기의 예리함, 튼튼한 갑옷, 견고한 전차, 좋은 말 따위는 말할 것도 없다. 아군의 병력이 저절로 많아지는 것이 아니며, 작전 능력도 싸울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최후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음에야!이 책략은 승리했더라도 승리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경계심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지휘관의 수양 수준과 정도를 나타내준다. ‘백전기법’ ‘승전(勝戰
잘 쓰면 모두가 인재요 내치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성당(盛唐-중국 역사의 시기 구분에 있어서 당나라를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으로 구분하는데, 이 시기에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다) 시기에는 최대로 확장된 영토와 무수한 인재라는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이 있었다. 확장된 영토가 없었다면 무수한 인재가 확보되지 못했을 것이고, 뛰어난 인재들이 없었다면 영토의 확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유명한 재상이었던 마주(馬周)의 경력에서 우리는 당 태종이 인재들을 어떻게 예우했는지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당 태종, 정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