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다르크' 호칭부터 지역구 5선 의원 그리고 집권여당 대표, '가장 난이도 높은' 검찰개혁도 그의 강단 없었다면?

秋장관에 붙은 '최초의' 수식어들, 그 중 으뜸은 민주당계 정당에서 '당대표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최초의 인물
정권은 유한하지만, '요술방망이'를 쥔 검찰권력은 70년동안 무한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뜯어고치지 못하고선
'검언유착'을 넘은 '검언동일체', '기울어진 운동장' 넘어 '깎아내린 절벽'에서의 싸움에서도 굴하지 않은 秋장관

[ 서울 = 뉴스프리존 ] 고승은 기자 = "그런 검찰개혁의 전쟁터에 누군들 나가고 싶었겠습니까? 웬만한 심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쉽게 출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추미애 장관의 강단 정도라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응원했습니다. 추미애 장관은 유독 최초의 수식어가 많은 정치인입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지역구 5선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서울 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최초의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최초의 판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선출직) 여당 대표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TK 출신 당대표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임기를 다 채운 당대표
여기에
*검찰개혁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법무부 장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17일 페이스북)

'수사권-기소권 독점' 등 요술방망이를 지닌 70여년 검찰에 대한 개혁드라이브를 이어가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16일 장관직 사의를 밝혔다. 추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2개월 정직’ 제청 직후 문재인 대통령에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또 “추 장관 본인의 사의 표명과 거취 결단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앞으로 숙고해 수용 여부를 판단하겠다. 마지막까지 맡은 소임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연합뉴스
'수사권-기소권 독점' 등 요술방망이를 지닌 70여년 검찰에 대한 개혁드라이브를 이어가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16일 장관직 사의를 밝혔다. 추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2개월 정직’ 제청 직후 문재인 대통령에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또 “추 장관 본인의 사의 표명과 거취 결단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앞으로 숙고해 수용 여부를 판단하겠다. 마지막까지 맡은 소임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연합뉴스

'수사권-기소권 독점' 등 요술방망이를 지닌 70여년 검찰에 대한 개혁드라이브를 이어가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 16일 장관직 사의를 밝혔다. 추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2개월 정직’ 제청 직후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같은 뜻을 밝혔다. 

이에 문 대통령은 “추 장관의 추진력과 결단이 아니었다면 권력기관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시대가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완수해준 것에 특별히 감사하다”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또 “추 장관 본인의 사의 표명과 거취 결단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앞으로 숙고해 수용 여부를 판단하겠다. 마지막까지 맡은 소임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직 추 장관의 거취가 확정된 것은 없다. 지난달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식 양도세 대주주 요건 변경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했을 당시, 문 대통령은 반려하고 재신임 결정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추미애 장관은 16일 밤 페이스북을 통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공명정대한 세상을 향한 꿈이었다. 조각도 온전함과 일체로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고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윤 총장의 징계수위를 기다리며 밤새 기다린 시민들을 향해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하얗게 밤을 지샌 국민 여러분께 바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며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 시를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추미애 장관, 문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당대표 시절, 추 장관을 최고위원직에 지명한 바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추미애 장관, 문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당대표 시절, 추 장관을 최고위원직에 지명한 바 있다. /ⓒ 연합뉴스

그럼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측은 “추 장관의 사의 표명과 무관하게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윤 총장의 징계안을 확정했음에도 이를 법원까지 끌고 들어가 정직 결정까지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저번 직무정지 때도 법원이 윤 총장의 손을 들어줬던 사례까지 있으니 말이다. 윤 총장의 직무정지와 정직 사유에 '재판부 사찰'까지 포함돼 있는데도 순순히 윤 총장 뜻대로 해주는 사법부를 향해 질타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추 장관의 사의 표명과 관련,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생각해 보면 굽이굽이 고비 고비 어려운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뢰밭이었다. 조국 전 장관을 할퀴고 간 자리엔 여전히 피자국과 포연이 자욱했고 검찰의 칼춤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던 전쟁터였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검찰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강조했다.

추미애 장관의 경우도 지난 9월 무릎 수술을 받은 자신의 아들이 군복무 중에 행했던 '병가 연장'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공격을 당했던가. 추 장관 아들처럼 병가를 나간 뒤 휴가를 연장한 사례는 지난 4년간 육군에서 3천여건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대단한 특혜라도 있던 것처럼 언론, 검찰, 야당이 집중적으로 몰아갔다. 특히 <채널A>의 경우에는 '병장회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네티즌들의 비웃음을 샀다. 

법무부 앞에는 추미애 장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놓여져 있다. 추미애 장관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깎아내린 절벽'에서 싸우고 있는 형국이라서다. / ⓒ 연합뉴스
법무부 앞에는 추미애 장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놓여져 있다. 추미애 장관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깎아내린 절벽'에서 싸우고 있는 형국이라서다. / ⓒ 연합뉴스

또 언론은 윤석열 총장 측의 '50억원'에 달하는 특수활동비에는 문제삼지 않고, 추미애 장관이 소년원을 방문해 원생들에게 '햄버거'를 돌린 점을 문제심아 공격했다. 2백여만원이 든 햄버거 구입비용을 특활비에서 쓴 것이 아니냐고 공세를 펼쳤으니, 미담으로 불릴 만한 것까지 문제삼는 한심한 모습도 보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집중공격,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깎아내린 절벽' 수준의 언론환경에서 맞선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일까? 사실 추미애 장관의 결단력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그런 검찰개혁의 전쟁터에 누군들 나가고 싶었느냐?"라며 "웬만한 심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쉽게 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추미애 장관의 강단 정도라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응원했다"고 밝혔다.  

추미애 장관은 지난 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해, 금뱃지를 달았다. 그는 이후 서울 광진을 지역구에서 내리 5선(17대 총선에서만 낙선)을 했다. / ⓒ KBS
추미애 장관은 지난 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해, 금뱃지를 달았다. 그는 이후 서울 광진을 지역구에서 내리 5선(17대 총선에서만 낙선)을 했다. / ⓒ KBS

여기서 추미애 장관에겐 유독 최초의 기록들이 많다. 정청래 의원이 언급한, 추미애 장관의 '최초' 기록들만 해도 ▲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지역구 5선 국회의원 ▲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서울 지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 최초의 여성 판사 출신 국회의원 ▲ 최초의 판사 출신 야당 국회의원 ▲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선출직) 여당 대표 ▲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TK 출신 당대표 ▲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임기를 다 채운 당대표 등이 있다. 

추미애 장관이 처음 선거에 출마해 금뱃지를 달았던 15대 총선(96년) 당시엔, 현직 여성 국회의원의 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당시 여성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집안 배경'이 매우 든든해야 가능할 정도로, 문이 굉장히 좁았다. 그만큼 정계는 꽤나 보수적인 곳이며 유리천장이 꽤 높다. 그러나 추미애 장관은 그런 '배경' 없이, 판사 시절 보여준 역량 등으로 인해 정치권에 영입됐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추 장관이 지역구 5선 의원(서울 광진을, 17대 총선에서만 낙선)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인으로서도 역량이 꽤 뛰어났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초기부터 강단있는 성격을 보여줘서 '추다르크'라는 호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추 장관은 당시 시대의 편견에 맞서 '유리천장'을 깨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추미애 장관에게 오래전부터 붙은 별명은 '추다르크'다. 그는 그 별명처럼 강단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일관성있게 보여왔었다. /ⓒ KBS
추미애 장관에게 오래전부터 붙은 별명은 '추다르크'다. 그는 그 별명처럼 강단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일관성있게 보여왔었다. /ⓒ KBS

언론에선 늘 '여성 정치인'이라고 하면 박근혜를 끄집어내곤 하는데 수구언론에서 만들어낸 '박정희 신화'에 모든 걸 의존했던 박근혜하고 자수성가한 추 장관을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불성설이다. 추 장관에 매우매우 실례가 될 일이다. 

박근혜에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마치 성평등을 이뤄낸 것처럼 왜곡하는 사례가 정말 많았는데, 허위로 만들어진 '박정희 신화'가 없으면 그리고 언론의 '형광등 100개' 띄워주기가 없으면 절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물론 박근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최태민 일가가 조종하는 '꼭두각시' 임이 전세계에 드러났으니. 

또 국가 수장이었던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을 받은 여성이 이어서 국가 수장직에 오르는 사례들은 라틴아메리카(남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자주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박근혜보다야 훨씬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런 후광을 받은 여성이 국가수장 자리에 오른다고, 그 사회에서 성평등이 실현되는 거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기존 기득권이 쥐고 있던 기득권만 더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추 장관이 이룩한 '최초'의 기록들이 꽤 많지만, 이 중 가장 높이 평가될 만한 서프라이즈한 게 있다면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으로 당대표에 선출된 뒤, 2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점이다.

2016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됐던 추미애 장관, 그는 이후 2년의 임기를 매우 성공적으로 마쳤다. /ⓒ YTN
2016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됐던 추미애 장관, 그는 이후 2년의 임기를 매우 성공적으로 마쳤다. /ⓒ YTN

실제로 민주당계 정당에선 추 장관 이전에 선출된 당대표(예전엔 총재)가 한 번도 임기를 채운 일이 었다. 그토록 리더십이 강력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임기를 채웠던 사례가 없다. 그만큼 민주당계 정당은 총선이나 지방선거 등에서 패하는 일이 잦았고, 중간중간 열린 재보궐선거에도 패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 계파 싸움도 굉장히 심했기에 당대표가 툭하면 교체되고, 중간에 비대위원회가 세워지곤 했다. 게다가 내부 갈등 등으로 당이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사례가 반복되며, 당명도 툭하면 바뀌었다. '이명박근혜' 정권 때만 해도, 민주당계 정당의 이름은 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뀌는 변천 과정을 거쳤다. 당명이 이렇게 흔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 내부가 지리멸렬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추미애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되고 나서는 크게 달라졌다. 추미애 대표 체제의 더불어민주당에선 '국정농단' 박근혜 탄핵을 이뤄냈고 이어진 대선에서도 압승해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러면서 추 장관은 '야당 대표'에서 '집권여당 대표'가 됐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는 대구경북권을 제외하곤 모든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등, 역대급 대승을 일궈내기까지 했다. 반대로 국민의힘(당시 자유한국당)은 유례없는 궤멸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추미애 장관은 당대표로서 대선 승리, 지방선거 압승 등을 이끌었다. 사진은 2018년 6월 지방선거 압승 소식이 전해지자 기뻐하는 추미애 당시 대표의 모습. / ⓒ 연합뉴스
추미애 장관은 당대표로서 대선 승리, 지방선거 압승 등을 이끌었다. 사진은 2018년 6월 지방선거 압승 소식이 전해지자 기뻐하는 추미애 당시 대표의 모습. / ⓒ 연합뉴스

추 장관은 연이은 압승을 지휘하며 성공적으로 당대표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당대표가 됐던 이해찬 전 대표도 총선승리를 일궈내며 당대표 임기를 역시 성공적으로 마쳤다. 추 장관이 당대표가 된 이후로, 과거 민주당계 정당들이 지리멸렬했던 모습은 국민의힘쪽으로 옮겨붙었다. 

이들은 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당 간판만 계속 바꿔다는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으며,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됐던 홍준표·황교안 전 대표는 각각 지방선거·총선에서 대패하며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비대위 체제만 계속 들어서고 있으며, 총선이 끝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비대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추미애 장관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은 가치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추 장관은 그런 최초의 기록을 남겼음에도 또다시 '최초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집권여당 대표에 5선 의원까지 한 거물임에도, 왜 그 어려운 '법무부 장관'직을 수락하며 '검찰개혁' 드라이브에 나섰을까. 

수사권-기소권 등을 독점한 검찰의 권력은 70년 이상 이어져 온 것이다. 종신집권을 꿈꾸던 군사독재 정권도 바뀌었지만, 그 검찰 권력만큼은 계속 이어져오고 있던 것이다. 이들이 악독한 마음을 먹으면, 무고한 사람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고 흉악한 범죄자도 처벌받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들의 막강한 요술방망이에 손 댄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 번 쥔 요술방망이를 과연 놓으려고 하는 자들이 있을까? 

한국의 검사권한, 다른 나라의 검사들의 권한에 비해 엄청나게 막강한 것을 알 수 있다. /ⓒ 교통방송
한국의 검사권한, 다른 나라의 검사들의 권한에 비해 엄청나게 막강한 것을 알 수 있다. /ⓒ 교통방송

사실 그들의 '요술방망이' 권한을 그대로 보장해주고 묵인해주면, 정권 입장에서는 편하게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반복된다. 바로 법조계에서 '전관예우'라는 단어로 포장된 '전관비리' 때문이다. 이런 '법 기술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사회정의는 실현이 되지 않으며, 시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야 더 실감하고 있지만,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검찰개혁이라는 과제였으니.

추 장관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깎아내린 절벽'과 같은 환경 속에서 싸워야만 했다. 거의 모든 언론은 윤석열 총장을 대놓고 편들어주면서 온갖 '가짜뉴스'까지 쏟아내며 여론을 왜곡하고 있으니 말이다. 추 장관은 '선택적 수사'가 어떤 것인지 검언유착 등으로 '정치검찰'의 행태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검찰당 대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정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아직 검찰개혁이라는 페이지는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들이 독점하고 있는 수사권을 제어하는 일도 남아 있고, 제대로 된 공수처 설치도 이뤄내서 범죄를 저지른 검사도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만드는 대표적 원인인 '전관예우'로 포장된 '전관비리'까지 없애야만 검찰개혁이라는 과제를 겨우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검찰개혁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법무부 장관"으로 기록될 것이다.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책을 꺼내는 추미애 장관의 모습, 해당 책은 검사 출신 이연주 변호사가 검찰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추악한 모습들을 폭로한 내용이 담겨 있다. / ⓒ 연합뉴스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책을 꺼내는 추미애 장관의 모습, 해당 책은 검사 출신 이연주 변호사가 검찰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추악한 모습들을 폭로한 내용이 담겨 있다. / ⓒ 연합뉴스

정청래 의원은 "제 촉과 느낌상 (윤석열 총장에 대한) 중징계(해임)가 나오지 않으면 (추 장관이)사표를 낼 것이란 짐작을 하고 있었다"며 "그래서 어제도 좀 더 버텨주시라고 글을 썼다. 그의 성격상 본인의 소임을 다 했고 혹시 당과 대통령에게 부담이 된다면 언제든지 무욕무심으로 돌아갈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처럼 추미애가 아니었으면 공수처법 통과도 검찰개혁도 어려웠을 것이다. 추미애 장관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에 검찰의 저항을 물리칠 수 있었다. 추미애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여담으로 추미애 장관처럼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인물은 누가 있을까? 바로 떠오르는 인물을 하나 꼽자면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을 꼽고 싶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뛰었던 이만수 이사장은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최초의 안타, 최초의 타점, 최초의 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그리고 최초의 100홈런, 200홈런, 250홈런 기록들까지 갖고 있다. 또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리그 타율·홈런·타점 모두 1위)까지 달성한 바 있다. 그래서 유난히 그에게 '최초의 사나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뛰었던 그는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최초의 안타, 최초의 타점, 최초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까지 기록했다. 그는 선수 은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팀(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정식코치(불펜포수)로도 수년간 활동한 바 있다. 이도 물론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일이다. / ⓒ KBS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뛰었던 그는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최초의 안타, 최초의 타점, 최초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까지 기록했다. 그는 선수 은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팀(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정식코치(불펜포수)로도 수년간 활동한 바 있다. 이도 물론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일이다. / ⓒ KBS

그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역대 최고의 포수로 늘 꼽힌다. 그는 또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80년대 최고의 타자로도 꼽힌다. 특히 수비부담이 많은 포지션인 포수를 맡고 있음에도 최고의 타격실력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팬서비스는 매우 훌륭했으며,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그는 프로 원년(1982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프로선수(16년)로 뛰었다. 은퇴 이후인 2011년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이해 선정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10'에도 선정됐으며, 또 베스트 10인 중 최다득표까지 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선수 은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팀(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정식코치(불펜포수)로도 수년간 활동한 바 있다. 이도 물론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일이다. 메이저리그 경력은 물론 마이너리그 경력도 없이 메이저리그 팀 정식코치를 한 사례는 정말 드문 일인 만큼, 매우 희귀한 기록을 세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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