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 남쪽 후즈넥이란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가난해서 공부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조교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돈이 없어 노상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빨리 성직자가 되어 좋은 옷과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꾸었다. 가난한 시골소년에게는 성직자가 출세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13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398년에 교수가 되었다. 1409년에 총장까지 되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생하기 150년 전에 교황에게 대든 신학자가 있었다.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었는데, 그는 요크샤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영국경험론의 선구자인 로저베이컨과 윌리엄 오컴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로즈베이컨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추리(推理)·논증보다 관찰과 실험을 중요시했다. 윌리엄 오컴은 위클리프보다 40년 전에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던 신학자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하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개체가 보편에 우선한다는 유명론
15c 이탈리아는 부유했다. 인도, 이집트, 터키 등 동방의 상품이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에 모였다가 프랑스와 독일 등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베네치아 제노바 등 해양도시들이 번창했고 피렌체나 밀라노 등 내륙국가는 염색, 갑옷제조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 상인 계급이 도시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고, 귀족들에 대한 열등감을 돈 자랑으로 해소했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과 학문 등에 투자해서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공공재에 대한 이들의 투자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부는 타락을 가져왔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사회가 되어갔다. 물욕
세상사에 행운이 오면 그에 따른 재앙도 함께 온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처남의 죽음으로 헝가리 왕관을 차지할 기회를 얻었고 경쟁자를 패배시켰으나 상대방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페르디난트에게 패배한 야노시는 외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이교도인 오스만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슐레이만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헝가리 내부 분란에 따른 원조요청이니 오스만제국으로는 굴러온 호박이었다(不敢請固所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자의 협력 요청이니 대단히 유익하다. 고구려의 멸망도 남건 남생
카를5세와 동생 페르디난트 1세1503년 한 사내아이가 스페인 왕가에서 태어났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낸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이 아이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였다.그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외손자였다. 이사벨 여왕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6년 전에 죽어 버려, 왕가를 이어갈 남자라고는 외손자밖에 없었다. 외손자가 한 명 더 있었으나 유아 사망율이 높았던 때였고 멀리 플랑드르의 친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이 아이는 스페인에서 자기들이 직접 보고 키울 수 있는 아기였다. 게다가 당시 이사벨라 여왕의 건강
괴테는 “그 시대의 여성을 모르면 그 시대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세상은 남자가 주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를 움직이는 것은 커튼 뒤의 여자인 것 같다. 어머니가 없으면 황제도 있을 수 없다. 카를 5세도 그를 음으로 양으로 도운 여인들의 힘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한 것 같다. 1. 어머니 광녀 후아나프랑스는 100년 전쟁후 왕권과 중앙집권이 강화되었고, 자연스레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이에 주변국들은 불안해졌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합
카를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신대륙을 포함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통치했다. 신대륙 개척 등으로 영토를 늘리며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끝없는 반란과 전쟁에서 제국을 지켜냄으로써 황제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시기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제후들과, 그리고 욱일승천하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와 싸워야 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와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기나긴 전쟁을 해야 했다. 먼저 G1이 된 프랑스는 카를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창세기 11장에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설하다가 하느님이 언어를 달라지자 탑이 붕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민족주의의 대두로 제국이 무너지는 현상을 상징한 게 아닐까.라틴어에 의한 지식 독점 종교개혁이 리틴어로 상징되는 카톨릭제국이란 바벨탑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유럽의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라틴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성경도 라틴어로 씌어졌고 설교도 라틴어로 했으며 로마 교황청의 공문서도 라틴어로 씌어졌다. 과거 동아시아의 한자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는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종교는 국가의 통치를 수월하게 한다.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도록 마음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이다. 규제완화가 저절로 되므로, 종교가 제 역할을 하면 국가는 강건해질 것 같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최고의 정치가는 모세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교가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종교지도자들은 대중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대형교회, 대형 불교사찰도 많다. 그래서 표를 바라는 정치인들은 교회나 사찰을 자주 찾는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신앙심 보다는 표에 관심이 있고 종교인들은 그들을 교화하기 보다는 민원 해결에 열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에 의해 군주론의 모델로 제시된 인물이다. ‘새로운 군주’의 모범이라며 새로 권좌에 오른 군주라면 반드시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부언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기만과 술책을 통해 교황령의 군주들을 신속하게 몰아내고 자기 영토로 만들어가는 능력에 경탄했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영감을 얻은 체사레를 불멸로 만들었다.체사레는 스페인 출신인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었다. 처음에는 교황의 뒤를 잇기 위해 추기경이 되었으나 추기경을 버리고 군인의 길로 나섰다. 아버지를 돕고 자신의 새 길을 개척하기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부화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하면 면죄부, 95개조 면죄부 반박문, 그리고 비텐베르크 성당 문이 떠오른다. 개혁의 주인공은 루터였고, 에라스무스는 조연인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란 책으로 유명해졌다. 교황과 성직자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당시 40쇄나 인쇄될 정도로 지식인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다. 에라스무스의 교황과 성직자에 대한 비판그는 이 세상의 원동력이 어리석음이며, 이것 없이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아 이 세상이 유지될
중세 교회권력이 절정에 달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 때 남프랑스에 카타리파라 불리는 이단이 등장했다. 이 이단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화려한 교회도 짓지 않았다. 때때로 부자들이나 고위성직자들의 사치를 비난하기도 했는데,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이 적어서인지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다. 교황청은 이단을 엄격하게 대했다. 이단을 허용하면 종교가 여러 개로 쪼개져서, 사악한 인간을 도덕과 문명으로 묶어온 종교가 힘을 잃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세력이 커져 자신들을 대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이슬람 세력과 십
23살 꽃다운 나이의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부모들의 민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한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고 애도하는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죽음의 원인이 100%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교실 내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문제를 학교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선생님들이 경찰 등 외부기관에 불려가는 일이 발생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치욕적인 사건들에 선생님들이 견딜 수 없게 된 것 같다.우리의
마키아벨리가 최고의 정치영웅으로 꼽은 인물이 모세다. 종교를 창시한 자가 어떤 정치지도자 보다도 사회 안정과 정의실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또 “종교가 있는 곳에서 군대가 쉽게 조직될 수 있다”며 로마의 종교제도를 세운 2대왕 누마가 건국자 로물루스 보다 로마의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했다(로마사 논고). 사실 영국은 종교를 위해 두 번이나 혁명을 일으킨 곳이었고, 해가 지지않는 제국을 구가할 때는 대단히 신앙심이 깊은 나라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을 추진한 동력도 사실은 기독교정신이라고 한다(미국인의 역
1492년 인노첸시오 8세의 선종후 스페인 출신인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이 새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선거에는 이탈리아 각국의 이해관계가 개입했다. 피렌체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넉달 전에 죽어 대책이 없었고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밀라노공국의 섭정인 ‘일모로’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찬탈하기 위해 교황의 도움이 필요했다.그는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스포르차는 과도기적으로 연로한 카르파 추기경을 밀었으나 의결정족수인 2/3를 넘지 못했다. 그 때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이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적이 많았다. 그 중에서 그를 가장 직설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사보나롤라」라는 수도사였다. 1452년에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페라라 궁정의 주치의로 신앙심이 대단히 깊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도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사보나롤라는 그 영향을 받았는지 신앙심이 두터웠던 중세를 사랑했고 1475년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도미니코회의 수도사가 되었다.설교와 예언적중, 인기상승1491년 성마르코 수도원장이 되어 설교를 시작했는데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반 속인들 보다 정치인, 고위 성직자, 은행가 등 권력자들을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