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위클리프, 시체가 화형당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생하기 150년 전에 교황에게 대든 신학자가 있었다. 위클리프라는 영국 사람이었는데, 그는 요크샤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영국경험론의 선구자인 로저베이컨과 윌리엄 오컴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로즈베이컨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추리(推理)·논증보다 관찰과 실험을 중요시했다. 윌리엄 오컴은 위클리프보다 40년 전에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던 신학자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하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개체가 보편에 우선한다는 유명론을 제시했는데, 개별교회가 카톨릭의 보편교회에 앞선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증거가 되거나, 경험으로 알려졌거나, 신성한 경전의 권위로써 증명되지 않은 한, 그 무엇도 사실로 상정될 수 없다.”며 추상적인 가설이나 이론을 평가절하했다. 사실 윌리엄 오컴은 위클리프 이전에 교황과 싸운 사람이었다. 당시는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지 얼마 안 된 시기라 교황 요한22세는 교황궁 등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교황은 성직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성직자들의 반발이 컸다. 오컴은 교황에 대해 청빈과 검약으로 살아가야 할 사도의 사명을 잊었다면서 맹렬히 비난했다. 

  성경읽기와 영어성경 번역

  위클리프는 이러한 옥스퍼드의 학문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교황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에 따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말이 담겨있는 성경을 우리 삶의 지침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루터의 오직 성격으로 구호는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보면 성령의 도움으로 쉽게 이해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교황청의 공식적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성경을 읽게 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가지게 된다는 말도 했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나오는 명구인데 위클리프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요즘 이 말이 참으로 의미 있게 느껴진다. 요즘 민주정치가 진영논리에 파묻혀 옳고 그르고를 묻지 않고 내 편은 무조건 옳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높은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곳곳에서 금도가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글러브낀 주먹으로 링안에서만 싸우는 권투가 인기 있었다. 그런데 요즘 격투기는 UFC가 대세다. 다리도 쓰고 글러브가 없어도 된다. 오각의 철창안에서 마치 짐승들이 싸우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정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위클리프는 일반 민중들이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1380년에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불가타 라틴어 성경만 인정되고 있었는데 불가타란 말이 ‘대중의 언어’ 란 뜻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성경 번역을 하면서 상류층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말하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부처님이 학자들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일반백성들이 쓰는 팔리어로 설법한 것처럼 기독교 교부들도 일반민중들의 언어를 중시했다. 일반대중들을 교육하려면 그들의 수준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영어 독일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을 반대한 교황청은 과거의 정신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이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불가타성경을 만든“히에로니무스도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사도들은 그들의 언어로 가르쳤으며, 프랑스왕은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고 영어 성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위클리프는 루터처럼 우리 모두가 사제라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다. “모든성도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므로, 하나님과 사이에 어떠한 중재인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성만찬 화체설에 반대

한걸음 더 나아가 성만찬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다. 당시 예배에서 성만찬은 대단히 중요했다. 설교를 라틴어로 했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빵을 축성하고 그것을 사제가 들어올리는 순간은 모두가 알아차렸다. 성만찬 축성 전에 종을 쳤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청의 입장은 화체설인데 축성하는 순간,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의 종이 울리면 신도들은 예수님의 몸이 된 빵을 보기위해 빵을 더 높이 올려달라고 외치기도 했다. 또 받은 빵을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가서 부적처럼 보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만찬에 미신적 요소가 들어갔고 교회는 이것을 즐겼는지 모른다. 화체설은 라테란 공의회에서 승인된 사항이었다. 축성한 빵이 인간의 살로 변하는 등 기적이 보고된 예도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미신적인 내용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을 것이다. 실제 1263년 화체설을 의심하게된 보헤미아의 사제가 자기 신암심을 다잡기 위해 로마 순례를 했다. 로마에서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수긍은 했지만 완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채 돌아오다가 볼세나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성만찬시 빵을 축성하자 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사건은 기적으로 승인되고 다음해 이날을 교황은 성체축일로 지정한다. 이 기적을 라파엘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교황접견실의 벽화로 그려내는데, 그림을 주문한 율리오 2세다.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기적을 기대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클리프는 축성해도 ‘빵은 빵일 뿐이라고 말했다. 오컴의 말처럼 스스로 증거가 되거나 경험하지 않은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위클리프는 자신을 뒷받침할 이론을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았는데, 성만찬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종교개혁당시에도 대단히 중요했다. 150년 후에 루터와 츠빙글리가 헤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니….

성만찬은 우리의 제삿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냄새만 맡는다.’흠향‘이란 말로 제문이 끝나기 때문이다. 음식은 이웃사람들과 나눠먹었는데 옛날에는 생명을 주는 행위였고 일종의 사회복지였다. 언제 어느 집에 제사가 있느냐가 거지들의 주요정보 중 하나였다니까. 예수님께서 빵을 나눠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한 것은 생명을 주는 음식을 나누는 데는 내가 항상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기존 카톨릭의 공식 교리를 대놓고 공격하는 위클리프에게 교황청이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화형당할 시대였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백년전쟁에 있었던 것 같다. 

에드워드3세와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프랑스 필립4세의 외손자인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일으킨다. 즉 필립4세의 딸인어머니 이사벨라가 영국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어머니가 대단히 미인이기도 했는데, 한 성질 했던 것 같다. 남편인 에드워드2세가 동성애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스코틀랜드와 전쟁에 지고도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등 내정도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을 폐위시키고 아들인 에드워드 3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을 한다. 그런데 에드워드3세는 중세 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랑받는 왕이었다. 왕으로 된지 3년 만에 어머니를 제치고 친정쿠데타를 일으켜 자기 체제를 구축하며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한다. 일례로 법정에서 종전에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였는데 영어로 바꾼다. 또 훌륭한 부인과 아들이 있었다. 왕비 필리파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처신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왕이 전쟁을 위해 대륙에 갔을 때는 잉글랜드를 스콧틀랜드의 침입으로부터 잘 지킨다. 또 에드워드 3세가 칼레를 굉장히 어렵게 함락시켰다. 그 결과 병사들의 피해도 컸고 자신도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5천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왕비는 화들짝 놀라 사람을 많이 죽이면 임신한 아이에게 안 좋을 수 있다며 왕을 설득했다. 그래서 필리파 왕비는 지비로운 왕비로 불리게 된다. 에드워드3세와의 사이에 8남 5녀를 낳았는데, 똑똑한 자녀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첫 아들 흑태자는 탁월한 장군이었다. 어떻게 보면 에드워드3세는 옛날 인도에서 말하는 전륜성왕의 조건을 가진 왕이었다. 

  한편 외할아버지인 필립4세가 죽고 나서 외삼촌 셋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후손 없이 죽었다. 카폐왕조가 문을 닫고 방계인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때 에드워드3세는 자신이 필립4세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가짜 왕을 쫓아내기 위해서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이것이 백년 전쟁의 시작이다.  

영국은 초반에 승리

첫 번째 전투는 크레시 전투로 영국군이 1만2천명, 프랑스는 3만~4만명이었다. 전투 당일 프랑스군은 행군해 오너라 지쳐 있어 왕은 병사들을 좀 쉬게 하고나서 공격하자고 했으나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영국군의 약탈행위에 화가 나 있었고 영국군의 병력이 많지 않아 쉽게 이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프랑스를 편들지 않았다. 비가 부슬부슬내려서 땅이 미끄러워 제네바 석궁병들이 활을 쏠 수 없다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석궁은 한발로 서서 다른 발로 장전을 하는 방식이어서 미끄러우면 쏘기가 쉽지 않았다. 기병부터 돌격했는데 영국 장궁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 궁수들은 기사 대신 말을 맞췄다. 왜냐하면 철갑을 두른 기사는 화살이 뚫기가 쉽지 않은 것을 미리알고 그렇게 대응한 것이다. 기병들이 무너지면서 프랑스는 대패한다. 영국군은 200~30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는 12천명의 전사자를 냈다. 

10년 후에 다시 푸아티에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 전투는 흑태자 주도하의 전쟁이었다. 중부프랑스에서 약탈을 하고 있는 흑태자를 응징하기 위해 장2세는 2만명의 병력을 동원한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와 비슷한 전술을 구사한다. 프랑스가 먼저 공격하게 해놓고 물러나는 척하면서 장궁을 비오듯 쏘았다. 그리고 프랑스 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 숨겨둔 기병을 동원해서 프랑스군의 배후를 기습했다. 이 때 프랑스군은 우왕좌왕하며 전열이 무너진다. 문제는 이 때 프랑스 군이 후퇴하면서 프랑스 왕이 사로잡혀 버렸다. 프랑스군은 2500명의 전사자를 내고  2000명이 포로로 잡힌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흑태자 전술의 승리였다. 

  전쟁비용과 영국재정의 궁핍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영국은 재정이 궁핍해졌다. 게다가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은 프랑스를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영국에서 낸 성직세가 다시 프랑스에 대한 전비 대출로 쓰였다고 한다. 영국왕실은 당시 제일 부자였던 수도원들의 재산을 전비로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황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는데 마침 위클리프가 적절하게 나서 준 것이다. 위클리프는 영국제일의 신학자였고 그와 논리로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영국왕실은 위클리프를 보호하게 되었고 교황청의 파문 등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영국 당국은 영국에서 거둔 성직세가 교황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는 것이 합법적인지를 묻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당연히 적법하다고 답변했다. 

와트타일러의 농민반란

그러나 전쟁비용이 많이 들다보니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야 했다. 칼레 수비병 등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 말기에 인두세를 1인당 4페니를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리처드2세 때에는 1인당 12센트를 부과했다. 그러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1381년에 와터타일러란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존볼이란 성직자도 이에 가담해서 반란의 대의와 명분을 제공했다. 그는 농민들 앞에서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을 할 때 귀족은 누구였는가?”하며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위클리프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위클리프는 백성들이 성경을 읽으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즉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할 수 있다고 했지 않는가? 반란군은 한 때 런던을 점령하기도 했다. 위킆리프는 존볼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귀족들은 위클리프 사상의 위험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고난

  이때부터 위클리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교회측으로부터 비난은 있었지만 왕이나 귀족들이 막아줬다. 교황 그레고리우스11세로부터 정죄를 받고 켄터베리 대주교가 청문에 소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랭커스터 공작과 리처드2세가 제지해서 위클리프는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와트타일러의 난이 일어나자 분위기가 변했다. 

 검은 수도사회는 주교 10명, 신학자43명 교회법학자 20명이 모인 회의를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개최했고, 성찬과 세속지배권 등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당시 15세였던 리처드2세는 이들에게 설득당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자신의 교구인 루터워스로 물러가게 된다. 만연에는 돈에 쪼들렸는지 이 교구를 팔고 더 작은 교구로 옮겨갔다고 하며, 1384년 12월 31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의 영향

  위클리프의 영향은 영국보다는 보헤미아에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에서는 ’롤라드파‘라는 순회설교자들이 있었으나, 위클리프의 실각과 함께 탄압도 겹쳐 큰 세력으로 커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보헤미아의 공주가 리처드2세의 왕비로 영국에 시집왔고 이들을 따라온 사람들이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하며 위클리프를 발견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보헤미아에 전달했는데, 순교자 ’얀 후스‘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얀 후스의 화형후 그의 시체도 꺼내져서 화형을 당하지만, 얀후스를 통해 위클리프의 사상은 다시 한 번 세상에 빛을 던지고 종교개혁의 자양분이 되었다. 암흑의 세상에 등불이 되었던 진리의 말씀은 꺼지지 않고 다시 이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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