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에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설하다가 하느님이 언어를 달라지자 탑이 붕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민족주의의 대두로 제국이 무너지는 현상을 상징한 게 아닐까.
라틴어에 의한 지식 독점
종교개혁이 리틴어로 상징되는 카톨릭제국이란 바벨탑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유럽의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라틴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성경도 라틴어로 씌어졌고 설교도 라틴어로 했으며 로마 교황청의 공문서도 라틴어로 씌어졌다. 과거 동아시아의 한자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는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사용하지 않는 고대 로마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라틴어성경을 읽지 못하는 목회자도 많았고 대중은 라틴어 설교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자국어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국어 읽을거리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루터가 개혁을 외치며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독일어 영어 등 토착어로 만든 성경이 나타나자 라틴어는 급격하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농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를 사용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보급했다.
로마 교황청은 자국어 성경번역을 금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경내용의 다의적 해석이 낳을 혼란을 염려하였으나 나중에는 교회질서와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다. 무엇을 금하게 되면 호기심을 자극하여 사람들이 더 찾게 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우리는 금지곡을 열심히 불렀다. 독일어 성경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이었고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소박한 삶과 면죄부 등 카톨릭 제국의 타락을 분명하게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위클리프 영어성경의 한계와 재번역 필요성
당연히 영어 성경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었다. 성경은 과거에 영어로 번역된 적이 있었다. 14세기 말에 최초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가 로마 교황청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다만 당시는 인쇄술이 보급되지 않아 영어 성경의 대량보급이 불가능했고, 위클리프 사후 로마교황청의 탄압이 강화되자 영어 성경의 보급은 확산될 수 없었다. 게다가 위클리프 성경은 그 번역 대본이 성서 원전(히브리어, 그리스어)이 아니라 오류가 많은 라틴어성경이었고, 중세 언어인 고어가 많아 일반 독자들이 읽기 용이하지 않았다<위키백과>. 그리스 원본을 바탕으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번역할 필요성이 있었다. 윌리엄 틴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틴들은 1494년 글로스터에서 태어나서 151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성서연구를 했다.
영어성경의 혁신적 용어 선택
틴들은 영어 성경에서 로마 교황청에 유리하게 사용된 단어들을 새로운 용어로 변경했다. “고해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 가 카톨릭의 의례인 고해성사를 연상시키므로 ‘고해’를 그리스어 원전에 가깝게 신 앞에서의 ‘회개’로 바꾸었다. 에라스무스도 이렇게 번역했었다. 카톨릭 제국의 지체처럼 느껴지는 ‘교회(church)’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회중(congregation)’으로 대체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교황 지배권의 근저를 흔들었다.
또한 기존 라틴어성경에서 ‘믿음 소망 자선’으로 되어 있던 고린도 전서 13장의 내용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번역했다. 그리스어 ‘아가페’를 기존성경에서는 ‘자선’으로 번역했으나 틴들은 ‘사랑’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이 자선이란 단어가 면죄부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제’를 ‘장로’로 번역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일반신도 위에 사제 계급을 두고 있는 제도가 성경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토마스 모어의 영어성경 박해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생기듯이 이러한 영어성경에 대한 카톨릭교회의 핍박은 가혹해 졌다. 가장 적극적으로 탄압에 앞장선 사람이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마스모어였다. 유토피아를 쓴 이상주의자답지 않게 토마스 모어는 구체제의 수호자였다. 출세를 함에 따라 그렇게 변해간 것인지 모른다. 유토피아를 쓸 당시에는 낮은 계급이었으나 틴들을 박해할 때는 재상(대법관 겸임)이 되어있었다. 인간이란 자신이 속한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토마스 모어는 틴들의 성경이 카톨릭 교회를 위협하고 있으며 틴들이 대중들을 선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어는 책만 불사른 게 아니라 책을 반입한 사람들도 화형에 처했다. 영어성경을 반입한 베이필드와 런던의 가죽상인 존 튜크스베리, 틴들의 서적을 가지고 있던 법률가 제이스 베인햄을 화형시켰다. 베인햄은 화형당하면서 “틴들의 저작에 오류가 없으며 영어 성경이 무척 좋다”고 고백했다<이동희, 종교개혁가들>.
윌리엄 틴들은 토마스 모어가 성경보다 전통을 더 높게 평가한다며 비판했다. 고백성사, 순례, 연옥, 십자가 기둥에 기도하기 등 가톨릭 전례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바보스러운 의식과 성사이며, 이런 카톨릭의 전례를 옹호하는 모어는 명예와 권력, 돈을 위해 복음의 진리를 팔아버린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비난했다<이동희, 전게서>.
토마스 모어의 구체제 수호와 죽음
토마스 모어 또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고, 로마 카톨릭 제국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의 행위에는 나름 일관성이 있었는데, 영국 교회를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헨리8세에게 반대했다. 그 결과 그는 처형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되었지만 구체제와 구질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 교회의 독립(수장령)은 헨리8세의 이혼과 관계가 있었다. 헨리8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이혼을 요청했지만, 로마교회가 정치적으로 불승인한데 대해 분개했다. 왕비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에 로마를 파괴(사코디로마)하고, 교황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카를5세 황제였다. 교황의 불승인은 카를 5세의 강박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사건만 없었다면 왕의 이혼 건은 관행상 승인되었을 사안이었다. 헨리8세는 교황의 불승인 문서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교황은 자기의 결정을 강제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헨리8세는 자기 고집대로 이혼을 강행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카톨릭 제국에서 탈퇴해서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반면에 토마스 모어는 보수적이었다. 형식에 사로잡혀 타락한 교회의 이익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영국의 이익을 꾀하지도, 성경읽기를 통해 일반 대중을 변화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았고 에라스무스와 친구였던 옛날의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으로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반동세력이 되어있었다. 틴들도 화형을 당했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살아남았다. 영국의 공식번역인 킹 제임스 성경의 기반이 되었다. 70%정도를 틴들의 번역에 의존했다고 한다.
바벨탑 붕괴와 동일한 방법의 징벌
지금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알고 있다. 신은 헨리 8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로마 카톨릭에 대한 징벌에 더 역점을 두었던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서유럽의 공용어가 사라지고 나라마다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카톨릭 제국은 분열되어 1/3이 분리되어 나갔다. 영어, 독일어 등 자국어 성경 번역이 라틴어 제국의 몰락을 재촉한 것이다. 신이 카톨릭 제국을 벌하면서 바벨탑을 무너뜨릴 때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
사법부의 신뢰 회복 기원
이균용 판사의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된 후 사법부 수장자리가 여전히 비어있다. 정쟁이 심화되어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판결이 나도 판사의 성향이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재판기간도 무한정 느려지고 있다. 판사님들이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하여 공평무사한 판결을 신속하게 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신이 판사님들의 말까지 달라지게 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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