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제가 학창 시절 때인가 저 유명(有名)한 흑백(黑白) 영화 ‘길’(La Strada, 1954년)이 생각나네요. 야수 같은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와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영혼을 가진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는 평생 서커스 동반자로 길을 떠돕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場面)에, 자기가 버린 ‘젤소미나’의 죽음을 알고 ‘잠파노’는 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길이 끝나는 바닷가에서 입니다. 애절(哀切)하게 울려 퍼지는 ‘니노 로타’의 그 유명한 트럼펫 연주 테마 음악은, 영화와 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리지요.

우리가 쓰는 ‘길’은 사람들이 정말 자주 쓰는 흔한 말입니다. 그 ‘길’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먼저 ‘에움길’입니다. 아마 이 뜻을 모르는 분도 많을 거 같습니다.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둘레를 빙 ‘둘러싸다’라는 동사(動詞) ‘에우다’에서 나왔지요.

‘지름길’은 질러가서 가까운 길이고, ‘에움길’은 에둘러 가서 먼 길입니다. 이렇게 ‘길’은 순수(純粹) 우리말입니다. 한자(漢字)를 쓰기 전부터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라(新羅) 향가(鄕歌)에도 나옵니다. 길을 칭하는 말들은 대개가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길 이름에는 질러가거나 넓은 길보다 돌아가거나 좁고 험한 길에 붙은 이름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인생 사(人生事) 처럼 말입니다. 집 뒤편의 ‘뒤안길’,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고샅’, 꼬불꼬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 거칠고 잡풀이 무성(茂盛)한 ‘푸서릿길’, 좁고 호젓한 '오솔길', 휘어진 ‘후밋길’,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자드락길’, 돌이 많이 깔린 ‘돌서더릿길’이나 ‘돌너덜길’,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자욱길’,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벼룻길’. 눈이 소복이 내린 뒤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그대의 첫 발자국을 기다리는 ‘숫눈길’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길’이란 단어는 단어 자체 만으로도 참 문학적(文學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이며, 사유 적(思惟的)입니다. ‘도로(道路)’나 ‘거리(距離)’가 주는 어감(語感)과는 완전 다르지요.

‘길’은 단순히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것 만을 의미(意味)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길이 없다.” 또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 길은 삶에서의 방법이거나 삶 그 자체입니다.

불교(佛敎)나 유교(儒敎), 도교(道敎) 등 동양 사상에서의 공통적 이념도 ‘도(道)’라고 부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평생 길 위에 있습니다. 누군 가는 헤매고, 누군 가는 잘못된 길로 가고, 누구는 한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또한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탄 탄 대로’가 있으면 ‘막다른 골목’도 있습니다. 세상에 같은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만 있을 뿐이지요. ‘프랭크 시내트라’에게는 “Yes, it was my way”였고, “I did it my way”였습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명시(名詩) ‘가지 않은 길’에서 이렇게 술회(述懷)했습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이렇게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떠나기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길을 간다’ 라는 말보다 ‘길을 떠난다.’ 라는 말은 왠지 낭만적(浪漫的)이거나, 애잔 하거나, 결연 합니다. 결국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거나, 고행(苦行)의 길이거나, 득도(得道)의 길이거나, 우리네 인생이 곧 길이요, 우리의 발이 삶입니다. 결국은 ‘마이 웨이’를 가는 것입니다.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에움길로 돌아서 가는 차이이지요.

인생 길은 결국은 속도와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름 길’로 가면 일찍 이루겠지만, 그만큼 삶에서 누락(漏落)되고 생략되는 게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움길’로 가면 늦지만, 많이 볼 것입니다. 꽃구경도 하고,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듣고, 동반자와 대화도 나눌 것입니다.

이렇게 저도 젊어 ‘지름길’을 택했다가, 낭패(狼狽)를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불연(佛緣)이 있었든지, 《일원대도(一圓大道)》에 뛰어들어 ‘도’의 ‘길’에 들어선 지 어언 4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자질(資質)이 모자라 아직 ‘대각(大覺)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헤매는 중생(衆生)입니다.

도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길’입니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것이, 중생이고요. 이렇게 도(道)라는 것은, 곧 길이요, 길은 무엇이든지 떳떳이 행함을 이름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경계에서나 바르고 떳떳하게 행하고, 은혜가 나올 수 있는 바른 길이 도(道)인 것이지요.

도(道)에는 하늘 · 땅 · 사람의 도가 있습니다. 그중 사람에게는 육신의 도 · 정신의 도가 있어서 경계를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근본 되는 도(道)는,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 되는 도입니다.

어떻습니까? 도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옛 도인은 코 풀기보다 쉬운 것이 도라 하였습니다. 우리 저와 함께 《일원대도》에 뛰어들어 ‘대각의 환희’를 느끼며, 중생의 탈을 벗어 보면 질러 어떻겠는지요!

단기 4357년, 불기 2568년, 서기 2024년, 원기 109년 1월 19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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