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한·중·일 생활이야기
일본 최고의 미인이 푸른 눈의 글래머?
일본에 난리가 났다. ‘푸른 눈의 일본 미인’이 탄생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실제 일어난 일이다.
지난 22일 도쿄에서 ‘제56회 미스 저팬 콘테스트’가 열렸다. 여기서 우크라이나 출신 귀화인, 시노 카롤리나(26)가 그랑프리로 뽑혔다. 그는 일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카롤리나는 일본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왔다. 20여 년 전이다.
그의 우승을 두고 일본 열도가 뜨겁다. 일본 미인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미스 저팬 콘테스트’의 경쟁 기준은 세 가지다. 내면·외견·행동의 아름다움이다.
어느 나라 미인대회처럼 교양과 건강미를 갖춘 미인을 선발하겠다는 취지다. 이중 외면의 아름다움은 다른 나라의 미인대회와 차별적이다. ‘미스 저팬’을 ‘미스 기모노’라고 부른다. 기모노가 가장 어울리는 미인이라는 뜻이다.
기모노는 짧은 다리와 신체의 곡선을 숨기는 의상이다. 1자형 의복이다. 그렇다 보니 긴 다리와 큰 키, 차랑거리는 머리와 풍만한 체격을 가진 여인, 즉 ‘키 큰 인형’이 그랑프리에 뽑히는 일은 흔하지 않다. 대신 또렷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피부를 가진 여인에 높은 평점을 주는 게 그동안의 전통이었다. 서양적 미인인 카롤리나 우승을 일본 미인의 기준을 무시했다고 비난이 이는 이유다.
반면 주최 측을 비롯한 일부 인사는 다양성의 승리라고 평가하면서 “그녀의 알맹이는 일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더 이상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인 셈이다.
50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전족 미인대회
그렇다. 나라마다 미인의 기준은 다르다. 또 시대와 함께 그 기준도 변해왔다. 지금의 기준과 일치하지 않는 미인상이 있게 마련이다.

미인대회는 미인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에는 16C 초부터 미인대회가 있었다. 오늘날 미인대회처럼 삼위(三圍, 가슴·허리·엉덩이 둘레)가 심사 대상이 아니다. 발 크기와 모양, 촉감과 향기 등이 심사 대상이다. 전족 미인을 뽑는 대회라는 얘기다. 얼굴을 가린 채 내민 엄지손가락 3배 반이 가장 이상적 크기였다.
모양은 납작할수록 높은 점수를 얻었다. 여성 가슴처럼 부드러운 감촉과 향기를 갖춘 전족에 가산점이 주어졌다.
‘전족 미인대회’는 유두(음력 6월 6일)와 정월 초하루에 주로 열었다. 양갓집 규수를 대상으로 했다. 여기서 우승하면 남성의 선망이 됐다. 규수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권문세가로부터 청혼이 줄을 이었다.
명문가 여인의 전족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일종의 상징자본이었다. ‘한족의 정신을 잇는 명문 가문의 여인’으로 인정받았다. 기녀를 대상으로 열리는 전족 대회도 있다. ‘화국대회’라고 했다.
누구나 미인이 되고 싶은 게 여성의 마음이다. 너도나도 전족했다. 청조 말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신분과 빈부를 가리지 않고 여성이라면 누구나 발에 천을 감았다. 심지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을 싸는 날, 찹쌀과 팥으로 경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
이를 점단(占斷)이라고 했다. 그래야 전족이 부드럽게 된다고 여겼다. 청나라의 세시풍속서인 《청가록》(구티에징 지음)에 나오는 얘기다. 전족 풍속이 없던 만주족 여인도 작은 발을 갖기 위해 발을 끈으로 동여맸다. 이를 화분저(花盆底)라고 했다. 반대로 유행에 뒤떨어진 여인은 흉이 됐다.
천족(天足·전족을 하지 않은 원래 모습의 발)을 ‘연꽃 따는 배’라고 했다. 금련이라고 했던 전족과 대비시켜 천대한 표현이다. 또 얼굴이 아무리 예쁜 여성이라도 전족하지 않으면 ‘반 토막 관세음’이라고 했다. ‘반쪽 미인’이라는 의미다.
표정 없는 여인이 일본 제일 미인이다
옛날 일본의 미인 기준은 검은 이와 넓은 이마다. 미인이 되기 위해 이를 검게 물들이고 본래의 눈썹을 뽑고 이마 위에 새로운 눈썹을 그렸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걸 오하구로(お齒黑), 눈썹을 지우고 새로 그리는 걸 히키마유(引眉)라고 한다. 1871년에 오하구로와 히키마유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메이지 유신 직전이다. 이런 화장법이 시작된 시점은 헤이안 시대였다. 헤이안 문화는 일본의 미의식을 키우는 온실이다. 당시 눈썹으로 여성의 신분을 구분했다. 눈썹을 보면 귀족인지, 평민인지 아니며 유곽녀인지 알 수 있었다. 결혼했는지, 자녀를 뒀는지도 알 수 있었다. 눈썹을 밀고 이마 밑에 눈썹을 그린 히마키유를 할 수 있는 여성은 귀족뿐이다.
히키마유와 오하구로 화장법은 짝을 이룬다. 히키마유만 하는 경우나 오하구로만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처럼 낯설고 희한한 미인관의 역사가 무려 1000년이나 된다니 놀라울 뿐이다.

상상해보라. 눈썹이 이마 바로 아래 있고 검은 색칠을 한 이를 드러내며 웃은 여성, 그게 당시 일본의 미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예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게이샤는 한발 더 나아간다. 흰 분칠을 한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오늘날 미적 관점에서 도저히 미인으로 간주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이다.
그럼 이런 미인관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히키마유와 오하구로는 대중과 차별을 꾀한 일종의 구별 짓기이다. 상당 기간은 이런 화장법은 왕족과 귀족, 그들만의 리그에 속한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오하구로를 한 사람은 높은 계급이다’, ‘자신들은 계급이 낮은 일반 백성과는 다르다’라는 문화적 계급주의를 추구했다. 이 같은 귀족의 취향을 따르지 않는 귀족은 사회적 질책을 받았다.
문화는 물과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고급문화는 저급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모방 결과가 진짜 아름다운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모방에는 객관성이라는 게 없다. 그것은 단지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비판 없이 추종하고 따라 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사회학습이다.
오하구로와 히키마유 화장을 한 여성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즉 감정을 숨길 수 있다. 이 때문에 오하구로와 히키마유를 ‘감춤의 미학’의 진수라고 한다.
그럼 여성은 왜 표정과 감정을 감춘 것일까. “오하구로는 부부화합의 맹세다”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시집가는 날 이를 까맣게 물들인 데서 유래된 속담이다. 하지만 말뿐인 부부의 맹세다. 실제로 오하구로는 남편에게 바치는 순종과 충성 표식이었다.
히키마유도 마찬가지다. ‘히키마유를 하지 않은 여인은 비천하다’라는 사회적 압력이 작용했다. 봉건사회가 정착된 이후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셈이다.
가체 하나 값이 기와집 두 채
한국의 패션의 꽃은 가체였다. 가체는 조선시대의 여성용 가발이다. 가체를 쓰기 전에 조선 여인은 딴 긴 머리카락을 위로 감아올렸다. 이 형태를 얹은머리 혹은 트레머리라고 했다. 얹은머리 위에 가체를 얼굴을 감싸듯 씌웠다.

가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리’가 필요하다. 다리는 두 가닥으로 꼰 남의 머리카락, 즉 가발이다. 가체를 쓰는 사람의 머리와 다리, 그리고 다리와 다리를 잇대어 가체를 만든다. 다리 한 단은 있어야 가체를 만들 수 있다. 다리 한 단은 다리 10쪽이다. 남의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꼰 다리 한쪽의 길이는 41cm다. 하나의 가체를 만들기 위해서 남의 머리 410cm가 필요한 셈이다. 신윤복의 그림, <그네 타는 여인들>에 서서 그네 타는 여인의 발아래까지 가체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어도 150cm는 될 듯하다. 그 굵기도 만만치 않다. 여인의 팔뚝만 하다. 그럼 그 무게는 얼마나 됐을까. 가체 무게만 4kg 정도로 추정한다. 가체에 치장한 장신구를 포함하면 적어도 5kg 가까이 됐을 것이다. 사람의 머리 무게는 4~5kg이다. 머리를 두 개 달고 있는 셈이다.
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은 일도 생겼다.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 <사소절>에 “근래 어떤 집의 열세 살 난 며느리가 가체를 높고 무겁게 만들었다. 시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오자 며느리가 갑자기 일어서다가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단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목숨을 바꾼 어린 신부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당시 패션의 사회상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다.
유행하던 가체에 쓸 머리는 어디서 났을까. 조선시대에 인조모가 있을 리 없다. 다리를 만들기 위해선 사람의 머리털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죄수와 승려의 머리털을 이용했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제주도 공물로 충당하던 궁궐에서도 가발의 재료가 부족했다. 머리털 값 상승은 불가피했다. 궁핍한 여인이 머리털을 몰래 팔아 생계를 도왔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남성도 상투를 쓰면 보이지 않는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시장에 내놨다.
조금 더 멋스럽게 상투를 쓰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정수리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백호 친다’라고 했다. 이 정도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맞추기는 역부족이다.
가체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다리 한쪽의 값이 초가 한 채와 맞먹었다. 가체 하나를 꾸미기 위해서는 초가 10채, 기와집 2채의 값이 들었다. 당시 여성에겐 최고의 명품 중 명품이었다는 얘기다. 아니 치장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머리 위의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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