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소 무덤이 최근 발견됐다. 적어도 8마리 이상이 묻힌 구덩이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 소 무덤에는 특이 사항이 있다. 도살 흔적이 없다. 온전한 소 한 마리에 해당하는 소뼈가 고스란히 나온 것이다.

일부는 관절이 연결된 상태였다고 한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17일 “동물 뼈가 부분적으로 출토된 사례는 있지만 소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구덩이 여러 개가 확인된 건 처음”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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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는 소 무덤의 위치에 주목하고 있다. 소 무덤 발굴지는 종묘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예지동 세운상가(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다.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에 제사를 지내던 국립 사당이다. 이 때문에 종묘 근처의 소 무덤을 제의와 관련된 제물일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학계에서 소뼈와 함께 출토된 유물과 종묘와 관계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엔 도성 10리(城底十里) 안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다. 왕릉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종묘 근처에서 발견된 소 무덤은 매우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사연이 숨어 있을 듯하다.

궁금증이 난다. 옛날 제례음식은 통째로 제단에 올리는 게 상례였다. 일례로 중국은 통돼지를, 우리는 돼지머리를 제단에 올렸다. 돼지머리는 돼지 한 마리 전체를 뜻한다. 제단에 오른 소 역시 신성하게 여겼다. 제사상에 오른 소를 한 군데도 버리지 않고 국을 끓여 사농공상, 귀천 구분 없이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그게 바로 한국 국물 요리의 대표선수인 설렁탕의 유례다.

설렁탕은 왕이 백성의 안녕을 빌어주는 상징과도 같은 음복 음식이었다. 설렁탕과 관련된 최고(最古)의 기록은 조선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이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마침 비가 장대처럼 퍼부었다. 세종은 “논에 있는 소를 잡으라고 명했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국인에게 소는 가족이다

음복 음식과 소 무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온전한 상태의 소를 매장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그 연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소 무덤 얘기가 나온 김에 한·중·일 세 나라의 소와 소고기 요리 얘기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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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소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다. 사람과 소의 교감이 주는 진한 감동을 준 영화, <워낭소리>는 한국인과 소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최 노인은 다리가 불편하다. 바로 서지도 못한다. 앉은 채 다리를 끌면서 제초제와 농약을 뿌리지 않은 풀을 먹이기 위해 소를 데리고 다닌다.

소에 대한 한국인의 각별한 애정이 옛날이라고 달랐을까. 개화기 우리나라를 찾은 한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인의 유별난 동물 사랑을 색다르게 봤다. 미국의 여류 작가인 펼 벅이다.

그는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첫머리에서 한국을 “고상한 사람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했다. 찬사를 보낸 이유와 감명받은 사연이 무엇일까. “시골길에서 짚단을 실은 달구지를 모는 농부가 짚단을 가득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소와 같이 걸어가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심성을 봤다”라는 게 그 내용이다. 맞다.

그것은 소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집에서 키우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생명 작가로 유명한 최수연은 《소-땅과 사람을 이어주던 생명》에서 “생구는 원래 한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소도 그렇게 불렀다”라고 적고 있다. 소를 사람과 똑같이 소중한 생명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소는 사실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목축업이 번성한 제주도는 새해에 맞는 첫 소의 날(丑日·제주도 사투리로 ‘첫쉣날’), 소의 건강과 무병을 빌었다. 음력 칠월 보름인 백중에는 가축을 주재하는 당신(堂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런 풍습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당당히 이름을 남긴 송아지도 있다. <태조실록>에 나오는 강릉 부사를 지낸 이엽의 집에 사는 소가 그 주인공이다. 태조실록은 “이엽 전 강릉 부사의 집소가 한 번에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쌍둥이 송아지 탄생이 ‘국가적 경사’로 실록에 실릴 만큼 중대사였다는 얘기다. 농업은 천하지대본이다. 조선 왕실은 송아지 쌍둥이 탄생에서 다산과 풍요의 의미를 담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한국인의 미각, 소고기에서 재발견되다

숭불정책을 펴던 고려시대에는 육식을 삼갔다. 고려 말 원나라의 침입은 한반도에 육식의 부활을 가져왔다. 당시 고려인은 소나 돼지 등을 잡는 일을 꺼렸다. 도살은 한반도에 살던 몽골인과 위구르인(回回人)에게 맡겼다. 이들을 ‘양수척(楊水尺)’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백정’인 셈이다.

많은 사람이 시대 구분 없이 백정을 도축업을 담당한 최하위의 천민으로 안다. 고려시대에는 일반 농민을 이르는 말이다. 백정이 ‘도살 전문 직업인’으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 초기다. 조선은 창업을 마친 뒤 사회안정이 필요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화전민과 양수척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피업종인 도축을 맡기고 백정이란 이름을 부여했다.

숭불정책 관련 그림들(고려시대)
숭불정책 관련 그림들(고려시대)

숭불정책(고려)에서 숭유정책(조선)로 바뀐 국시가 국민 의식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음식 관습과 취향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게 됐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건 육식 문화였다. 소고기 육식 문화도 변화를 겪는다. 조선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노동력 보호라는 명분 아래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왕명이 수없이 내려진다.

태조 이성계는 “난폭한 무리가 아직도 법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소를 잡고 있다. 이제부터 위반하는 자는 엄격히 다스릴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소고기 맛을 본 일부 귀족을 중심으로 밀도살한 소고기를 먹는 일이 잦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일부 탐욕적 식탐가의 소행일 수도 있다. 그보다는 영양이 부족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보약으로 소고기를 먹었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조선 중기로 넘어온 뒤 보다 공공연하게 육식을 즐기게 됐다. 지금 ‘자장면 먹는 날’ ‘빼빼로 먹는 날’처럼 ‘쇠고기 먹는 날’이 있었다. 난로회(煖爐會)가 그것이다. 아동문학가 김정호가 쓴 《조선의 탐식가》에 난로회의 유래를 제시하고 있다.

《조선의 탐식가》는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루,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쇠고기를 기름장․달걀․파․마늘․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하는 《동국세시기》와 ‘정조 5년 겨울, 정조가 밤늦게 일하는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유생을 불러 난로회를 열었다’라는 《홍재전서》를 전재하고 있다.

최고 식탐가인 서태후가 소고기를 먹지 않은 이유

우리 조상의 미각은 소고기를 통해 재발견된다. 소고기는 부위별로 맛이 다르다. 소고기 부위를 세밀하게 구분해서 요리했다. ‘문화인류학의 대모’로 불리는 마거릿 미드는 소고기에 대한 미각이 가장 세분된 민족으로 우리 한민족을 꼽았다. 무려 120개로 분류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가 51개로 분류한 동아프리카의 보디 족이다. 세계 최고의 미감을 자랑한다는 프랑스도 35개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규태가 쓴 《한국의 음식》에 나오는 얘기다. 한국인이 소고기 부위 얼마나 세세하게 구분했는지 잘 보여준다.

소와 중국의 문화모습
소와 중국의 문화모습

우리와 같은 농경사회인 중국도 소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 〈육식 터부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고기는 먹지 마라?》(프레데릭 J 시몬스)는 중국인이 소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저서는 “19세기 중국에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소는 찬양의 대상이었다.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육류에는 소고기가 포함되지 않았다. 쇠기름으로 양초도 만들지 않았다. 소의 도살이 여성이나 영아의 살해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왕과 공자에게 바치는 제물로는 허용됐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식도락의 극치를 보여준 청나라 서태후조차도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인간을 대신해서 농사일하는 소에 대한 통치자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연히 도축에 통제가 가해졌다. 청나라 때 가장 심했다. 불법으로 도축하는 자에게 사형을 처했다.

소를 ‘우대’하는 풍습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2,000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소는 귀중한 노동력이었다. 전시에는 중요한 전략자산이었다. 운반, 우유, 가죽, 제사 제물, 비료 등 활용도가 매우 컸다. 한나라 때 장례식 음식으로 소고기 요리를 만들었다. 이를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했다.

가장 귀한 제례 음식인 셈이다. 그만큼 귀했다. 당시는 제후조차도 평시에 소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새해 첫날만 소고기를 먹는 특혜가 주어졌다. 특별한 음식은 하나의 권력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제후의 행위’가 있다. 손의 귀를 한 움큼 손에 드는 것이다. 소고기는 곧 부와 권력 상징이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옛날 중국 농가는 소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중국 농가에서는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 소를 맸다. 일종의 부의 과시다. 중국인은 경제적으로 웬만큼 힘든 일이 생겨도 농사일을 돕는 소를 좀처럼 팔지 않는다.

노동력이 재산인 시절의 얘기다. 소는 최고의 농사 일꾼이었다. 혹시 내다 팔아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다면 매수자의 품성까지 따져보고 거래했다. 자신이 키운 소를 산 사람이 잡아먹거나 학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의 육식 혁명은 간도우대지진에서 완성됐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기 전 1,200여 년 동안 육식이 금지했다. 불교가 수용된 나라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불교국가인 일본에서는 고기를 먹는 일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심지어 푸줏간을 지나는 것조차 꺼렸다. 에도시대에 다이묘가 가마를 타고 정육점을 지날 때면 가마를 높이 쳐들었다.

정육점 안에 있는 고기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깃덩어리를 보면 부정을 탄다고 여겼다. 당시 정육점은 약국으로, 소고기는 건강식품으로 ‘대접’받았다. 푸줏간을 ‘쿠스리구이’(藥喰)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소고기를 된장에 절인 ‘반혼간(反本丸)’과 말린 소고기(육포) 등을 약으로 판매했다.

1867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됐다. 일본 근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종의 정치혁명이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음식 혁명’이다. 육식이 시작됐다. 육식은 문명이 됐다. 메이지 텐노는 1871년 육식금지령을 전격적으로 해제했다. 스스로 큐나베를 시식했다. 육식 권장을 위한 퍼포먼스였다. 효과가 있었다. 소고기 도소매업인 고메큐((米久)도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규나베전문점인 마츠키야(松喜屋)도 영업이 시작됐다. 여기서 거래되는 육용 소를 야쿠니쿠요우큐우(役肉用牛)라 불렀다. 그렇다고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나 식품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신형 공포증(Neophobia) 현상’ 때문이다. 흰옷을 입은 5명의 자객이 메이지 텐노 살해를 음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1923년 간토우대지진으로 사라졌다. 배고픔 앞에서 전통도, 식성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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