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지난 1일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어펜져스(펜싱+어벤져스)’가 헝가리의 아성을 넘었다. 45 대 41. 리우와 도쿄올림픽에 이어 3회 연속 우승이다.

펜싱 사브르는 헝가리가 모태의 나라다. 헝가리의 조상은 마자르인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말갈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족이다. 슬라브족을 정복한 머저러스사드(마자르인의 나라·헝가리)는 몽골 기병에 패퇴하기 전까지 유럽 최강의 기병단을 보유했다. 사브르는 그 당시 기병전을 벌일 때 사용했던 검술이다.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탄 채 싸우기는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후사르라는 경기병(輕騎兵)이다. 후사르는 특별한 무장 없이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재킷을 입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나폴레옹 황제의 기병대의 이름도 ‘레 후사드’라고 했다. 경기병이 싸우는 모습을 모티브로 만들어 진 게 바로 펜싱 사브르다. 기마병의 칼은 상대편의 상체를 공격한다. 찌르거나 벤다. 사브르의 공격 범위가 상체에 국한된 이유다. 물론 팔과 머리도 포함된다. 또 에페와 플뢰레는 찌르기만 공격 포인트로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스포츠로서 펜싱을 체계화한 나라는 프랑스다. 우리 남자단체 사브르팀은 준결승전에서 홈팀 프랑스를 45 대 39로 꺾었다. 종주국을 뛰어넘는 뛰어난 검술로 명실상부하게 세계를 제패했다. 낭보는 이어졌다. 4일 여자단체전에서 한국은 은메달을 땄다. 준결승전에서 프랑스를 이겼지만, 결승전에서 우크라이나에 아쉽게 패배했다.
지난주에 칼과 관련한 기쁜 소식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일본도로 이웃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피해자가 희생됐다. 칼은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양면의 칼날을 갖고 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중·일의 도검의 차이에 대해 알아보자.
도검은 인류의 보편적 문화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나 칼은 있다. 나라마다 독특한 특성을 보이며 발전했다. 전통과 문화와 접목됐다. 특히 주술 목적인 벽사의 예술품으로, 권력과 권위 상징으로, 문화교류의 매개로, 과학기술 수준의 척도가 되는 무기로, 그 역할은 다양했다.
한국 남녀단체팀, 펜싱의 종주국을 꺾다
우선 전설적 보검을 몇 가지 소개하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검은 영국의 엑스 걸리버다.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몇 년 전 7인조 아이돌그룹 ‘킹덤’의 앨범에 수록된 ‘History Of Kingdom : PartⅠ. Arthur’의 소재로 사용된 신검(神劍)이다. 엑스 걸리버는 영국의 아서왕의 전설을 담고 있다. 이 보검은 캔터베리 대성당 돌계단에 박혀있었다. 계단에 ‘이 칼을 뽑는 사람은 신이 선택한 영국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서가 이 칼을 뽑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엑스 걸리버가 아서를 왕으로 선택한 것이다. 아서는 ‘불사조’가 됐다. 아서왕은 원탁의 기사와 함께 로마제국의 침입을 물리친다. 왕 아서는 기사도의 상징이 됐다.

우리나라에도 전설 같은 보검이 있다. 전어도(傳御刀)가 그것이다. 엑스 걸리버처럼 전설을 담고 있다. 고려 공민왕의 스승인 나옹 선사가 함흥을 지날 때 일이다. “한 묏자리를 보고 왕이 날 자리”라고 말했다. 마침 이자춘의 몸종이 이 얘길 들었다. 주인에게 전했다. 뒷날 이자춘이 이 묏자리를 팠다. 칼이 세워진 채 박혀있었다. 이자춘은 이 칼을 아들에게 줬다. 아들이 바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다. 이성계는 늘 전어도를 차고 다녔다. 전어도는 창업(王位)의 정통성을 부여했다.
이 칼은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설 속의 전어도가 실존한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전설 속의 명검은 아니고 나중에 태종 이방원이 환심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바친 ‘모조품’이다.
그렇다. 두 가지 사례에서 명검이 전설이 되는 과정을 봤다. 정당성의 필요가 사건을 만든다. 창작된 사건은 과장된다. 과장된 사건에 상상력이 덧붙여진다. 전설이 역사적 사실처럼 꾸며진다. ‘명검의 나라’ 중국에는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명검’이 수없이 많다. 최고(最古) 명검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시대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중원의 패권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오월’이다. 오월은 수십 년 동안 전쟁을 벌인다. 지략가 오자서의 도움을 받은 오나라는 월나라를 압도했다. 힘이 약했던 월나라는 칼을 좋아하던 오나라 왕에게 보검 세 자루를 선물한다. 어장검(魚腸劍), 경영검(磬郢劍), 담로검(湛盧劍)이 그것이다. 이중 어장검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공자 광의 아버지는 오왕 제번이다. 제번은 형제 왕위승계를 유언으로 남겼다. 막내까지 이어지지 않고 셋째, 여매에 와서 끊겼다. 여매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오왕 료가 그다. 부자 승계한다면, 제번의 맏아들인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에 불만을 품는다. 결국 공자 광은 오왕 료를 살해한다. 오왕 료는 월나라와 전쟁 중이었다. 그때 사촌 형인 광이 료를 초대했다. 지하실로 유인했다. 자객 전제에게 구운 생선을 대접하라고 명한다. 생선 배 속에 비수가 감춰져 있었다. 칼이다. 그게 바로 어장검이다.
어장검을 만든 이는 초나라의 장인 간장이었다. 간장은 또 초나라 왕으로부터도 명검 제작을 주문받는다. 최선을 다해 칼을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내인 막야가 나섰다. 자기의 머리카락을 자라 쇳물에 던졌다. 명검이 만들었다. 두 자루였다. ‘간장검’과 ‘막야검’이다. 합려에게 한 자루만 헌상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합려는 간장을 죽였다. 간장은 죽기 전 아들 마간척에게 물려 주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루의 칼을 은밀한 곳에 숨겼다. 세월이 흘렀다. 장성한 미간척이 복수에 나섰다. 도움을 주겠다던 한 강호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는 미간척의 목을 쳐서 그의 목과 명검을 갖고 초나라 왕에게 간다. 강호인은 솥에 미간척의 목을 삶았다. 이를 초왕에게 보라고 한다. 복수의 꾐이었다. 솥으로 고개를 국인 초 왕의 목을 쳤다. 자기의 목도 찔렀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목이 한 솥에서 끓게 됐다. 그 세 사람의 머리를 함께 묻었다. ‘삼왕묘’라고 불렀다. 간장검과 막야검은 죽음으로 복수하는 ‘원한의 칼’이 됐다.
이젠 ‘월왕구천도’ 순서다. 이 칼은 중국 최고(최고)의 명검이다. 구천은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이다. 와신상담 끝에 오나라 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복수했다는 전설의 칼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제작된 지 약 2,500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칼로서 기능을 한단다. 이 청동검의 ‘모형도’는 강릉시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이 같은 명검은 출생지가 같다. 저장성 용천이다. 용천이 보검의 고장이 된 것은 역시 구야자라는 명검 제작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의 문인인 이백도 용천검을 차고 다녔다. 시도 남겼다. “용천검을 뽑아 춤을 추고 싶다”라는 게 그 구절이다. 용천보검의 손잡이에는 황금으로 북두칠성(七星)과 일원(日月) 문양이 전각 되어 있다. 용천보검은 황제나 장수 재사에게 소유되면서 권력이나 지위를 상징했다. 이는 다큐멘터리 ‘세계 견문록 아틀라스-용천보검’의 내용이다.

용천보검에 대한 용천 사람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보통 집에 칼 하루는 갖고 있다. 액막이용 칼이다. 용천보검은 방에 두면 자색 빛이 난단다. 자색의 기운이 방 전체를 감싸기 때문에 사람도 방 주인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시진핑 등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모두 용천보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칠성(七星) 문양과 해와 달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칼로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다
도검은 일종의 의로운 기물인 셈이다. 벽사의 기능도 수반한다는 얘기다. 특히 문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벽사의 검’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조선의 독특함이다. 또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에도 볼 수 없다. 칼이 삿된 것을 물리치는 상징이다. 조선의 최고 명검으로 꼽히는 사인검(四寅劍)이 그것이다. 인(寅)은 십이지 중 호랑이를 뜻한다. 4寅(년, 월, 일, 시)의 시각에 맞춰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1398년 무인년에 제작된 이래 조선왕조 내내 계승되었다. 500년 왕실의 평안과 번창을 기우했던 주술용 보검이다. 칼 한쪽에 북두칠성과 28수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전서로 칼 이름 등 30자가 새겨져 있다. 삼정도, 삼정검이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국가원수가 보직 받은 장군에게 하사하는 의전용 칼이다. 바로 그 모델이 사인검이다. 사인검을 궁에 보관하거나 공신에게 하사했다. 벽사와 함께 유가의 절대 덕목인 인, 의, 예, 지를 구현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의전용인 만큼 정교하고 고급스러워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종은 그중에 하나를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선물했다. 그것이 2016년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에 연대박물관에 기증됐다.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명검도 있다. 백제의 명검, 칠지도(七支刀)도 그중 하나다. 일곱 개의 칼날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뻗어 오른 ‘칠지도’, 한성백제의 귀중한 유물이다. 비밀에 묻힌 한성백제와 한일고대사를 풀어준 열쇠와 같은 보물이다. 거기다가 문화의 힘으로 국가의 입지를 다진 문화강국 백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제의 명검 ‘칠지도’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라고?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도 가장 깊숙한 금족지(禁足地, 사람의 발길을 금하는 곳) 신고(神庫)에 모셔두고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을 모시는 신사다. 일본은 칠지도를 국보로 지정했다. 황궁 보물 3개 중 하나다. 그 근거는 역사적으로 폐기된 임나일본부설에서 비롯된다. 신공황후가 가미가제(神風)로 삼한정벌을 했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가 있다. 공교롭게 일본의 역사서인《일본사기》는 ‘전설’을 ‘역사’로 둔갑시켰다. “신공황후 52년(369년) 가을, 백제 사신 구정 등이 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등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라는 게 그 기록이다. 백제가 일본에 바친 조공이라고 주장이다. 하지만 칠지도에는 ‘백제왕(근초고왕 추정)이 왜왕에게 하사한다. 후세에 전하라’고 금 상각된 글씨가 적혀 있다. 이것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 일본은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칠지도가 한일문화 교류의 상징이라면 신라의 황금보검은 페르시아와 교류의 흔적이다. 신라와 페르시아는 아시아의 동서 양단에 있었다. 무려 2만㎞나 떨어져 있다. 페르시아가 고향인 ‘신라 문화재’는 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황금보검이다. 경주 계림 14호분에서 출토됐다. 36cm의 단검이다. 황금보석으로 상감 장식되어 있다. 황금보검과 유사한 형태의 칼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발견됐다. 또 중국 서쪽 키질 석굴의 벽화에 신라 보검과 유사한 그림이 남아있다. 이들 지역은 5~6세기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황금보검이 발견된 계림로 14호분은 왕릉이 아니다. 무덤의 크기도 작다. 신라 귀족의 것으로 추정된다. 황금보검은 무덤의 주인과 함께 순장된 유물로 보인다. 어떻게 왕도 아닌 귀족이 이 귀중한 보물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다.
페르시아의 보검이 신라 귀족의 무덤에서 나온 이유?
그렇다면 한·중·일 세 나라 칼의 형태 차이는 무엇일까. 중국과 일본 칼과 달리 우리만 가진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리 전통 도검에는 ‘피 홈’이 있다. 일본이나 중국 칼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칼등에 길게 패인 홈을 만든 것이다. 적을 찌르거나 벨 때 피를 흘려보내도록 고안한 것이다. 그것이 처음 도입된 것은 청동으로 만든 세형동검이다. 두 번째로 손잡이에 동그란 고리를 단 환두를 꼽을 수 있다. 환두는 몸에 차기 편하게 칼집에 동그란 고리를 단 칼을 통칭한다. 이 고리를 이용해서 칼을 몸 뒤쪽에 매달 수 있다. 활을 쏘기에 편하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고리가 없어 칼을 옷 속에 집어넣는다. 환두는 3국 시대부터 나타난다. 환두는 일종의 장식용으로도 사용됐다. 신라는 환두에 봉황을, 백제는 용을, 가야는 용과 봉황으로 장식했다. 전투용 칼이 아니라 권위의 목적으로 지휘관이 칼을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이 차는 칼을 당검이라고 한다.
환도의 종류는 쌍검, 패도, 쌍수도, 예도 등으로 나뉜다. 기본적인 조선의 칼은 곡선형이고 일본도는 직선형, 중국도는 직선형에 가까운 만곡형이다. 조선도의 칼집에는 잠금장치가 있다. 일본도에는 없다. 칼날의 단면도 우리는 배영 구도다. 일본도는 육각도 구조다. 조선도에 독특한 형태의 칼 중에 ‘일면평조형도신’이라는 게 있다. 한 각은 예각이고 한 각은 조금 각이 깊게 만든 하이브리드형이다. 이렇게 만듦으로써 부드러운 짚단과 단단한 대나무도 자르거나 벨 수 있다.
단면을 보면 한·중·일 칼의 특징이 보인다
일본은 ‘칼의 나라’다. 일본도는 사무라이 혼이다. 일본은 사무라이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도는 급속히 발전한다. 일본도의 원형인 완만하게 휜 타치가 모습을 드러낸 때가 사무라이가 탄생한 가마무라 시대다. 소슈 마사무네라는 전설적인 ‘도검의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칼이다. 지금도 ‘마사무네’는 ‘명검’이라는 보통명사로 쓰인다. 무로마치시대로 넘어오면서 타치에 비해 길이가 짧은 우치가타나(약칭 카타나)가 등장했다. 휴대가 편했다. 거기다가 칼 폭은 넓어졌다. 위력을 더 한 것이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도 한 칼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다. 카타나가 대세를 장악한다. 타치는 허리에 끈으로 고정한다. 카타나는 옷 안으로 꽂고 다녔다.

이외에도 길이(1m~3m)가 길어 어깨에 메는 노다치(野太刀)와 휴대용 혹은 호신용 탄토우(短刀)인 와키자시(脇指)가 있다. 노다치는 임진왜란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도는 일본 칼처럼 길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무라이는 긴 칼과 짧은 칼을 두 개를 차고 다녔다. 특히 와키자시는 몸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밖에 의식이나 제례용은 츠루기(劍)이 있다.
일본도를 만드는 철은 시마네현에서 나오는 타타라라는 사철이다. 철을 두드려 편 뒤 접기를 반복해서 강철과 연철을 합친다. 이를 다마하가네(玉鋼)라고 한다. 이 과정을 거쳐 만든 접쇠칼은 강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 기하학이고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져 그 가치를 더 한다. 하지만 접쇠는 미학적 도검을 만들기 위해서 한 게 아니다. 일본의 철 재질이 좋지 않아서다. 제조 방법을 통해 약점을 보완한 셈이다.

중국의 칼은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기마민족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말을 타면서 칼을 다뤄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손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잡이가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의 모양도 직선에 가까운 만곡형인 게 특징이다. 중국 칼은 시대에 따라 안모도(雁毛刀, 한·당), 유엽도(柳葉刀, 명), 우미도(牛尾刀, 청) 등으로 불리지만 큰 특징에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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