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조상의 여름나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부채다. 부채를 빼놓고 더위 나기를 얘기할 수 있느냐”라는 내용이었다. ‘팥소 없는 찐빵’이라는 지적이었다.

물론 한·중·일 3국의 부채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으로 받아들였다. 감사할 뿐이다. 필자의 글에 관심을 두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부채 든 사람이 있는지 살펴봤다. 거의 없다. 지난해엔 그렇지 않았다. 부채가 젊은 여성의 패션 아이템으로 부각할 정도로 인기였다. 패션과 유행은 하루가 다르다. 유행변화를 두고 할 말은 없다. 다만 요즘 같은 찜통더위에서는 부채로 시원한 감동을 기대할 수 없다. 부채 바람의 효과는 없다. 부채질하면 더운 바람이 난다. 습식사우나에서 찬물을 뿌리는 원리와 비슷하다. 찬물을 뿌리면 사우나 열기가 식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조금만 지나면 습도가 더 높아져서 공기를 데운다. 땀이 훨씬 더 많이 난다. 어떤 유행도 찜통더위를 이길 수 없나 보다.

부채에 앞서 에어컨 얘기를 하자. 필자가 싱가포르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1998년 봄이었다. 호텔은 ‘냉동실’이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때문이었다. 열대지방에서 냉방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열대성 적도 기후대인 싱가포르에서 에어컨이 없으면 살 수 없단다. 근대 싱가포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콴유는 “에어컨이 오늘날의 싱가포르 성공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열악한 기후환경에서 비롯된 전염병, 낮은 산업 생산성 등을 극복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에어컨의 출발은 냉방 가전제품이 아니다. 종이 인쇄물의 습기 제거 장치였다.

부채 바람은 권력을 만들다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다. 온도와 습기 조절이 가능해짐으로써 에어컨은 인간을 위한 냉방장치로 변신했다.

사진: 불볕더위를 이기는 데는 손 선풍기도 좋지만 햇빛도 가리고 바람도 일으키는 부채가 제격이다.
사진: 불볕더위를 이기는 데는 손 선풍기도 좋지만 햇빛도 가리고 바람도 일으키는 부채가 제격이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부채의 본질적 기능이다.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본래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대 중국의 전설 속 천자인 순임금의 오명선(五明扇)과 주나라 무왕의 초량선(招凉扇)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임금은 어진 신하에게 부채를 하사했다. 전설이 아닌 실제의 상황에서 부채의 권위는 이어진다. 당·송 시대에도 유능한 신하를 추천한 사람에게 준 왕의 선물이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축하선물로 공작선(孔雀扇)을 받쳤다는 얘기가 나온다. 공작선은 왕에게만 허락된 권위의 상징이었다. 권위를 나타내는 부채는 자루가 길고 길 깃털로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황해도 안악 3호 고구려 고분벽화(357년)의 주인공 동주도 깃털 달린 부채를 안고 있다. 동주는 이 고분의 주인공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다른 용도는 왕족과 귀족의 행차 때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됐다. 얼굴 가리개였다. 제갈공명이 손에 놓지 않았다는 학우선(鶴羽扇)도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학의 깃털로 만든 학우선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부인 황 씨가 제갈공명에서 선물한 차면선(遮面扇)이다. 이를 볼 때 아주 옛날 부채는 고위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식의 도구였다.

부채가 본래의 기능을 찾게 된 것은 손잡이가 짧아지고 들고 다닐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생활 도구가 된 것이다. 중국의 고전 사극의 소품은 대부분 원형의 단선이다. 단선은 동한(東漢) 궁녀가 처음 만들었다고 궁선(宮扇)이라고 불렀다. 궁선은 둥근 모양의 부채를 뜻한다. 우리는 이를 방구부채(둥근부채)라고 부른다. 대표적 방구부채는 올림픽 대회 입장식 때 우리 선수가 손에 들린 태극선이다. 방구부채에 진일보한 게 접선(摺扇)이다. 합죽선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부채다. ‘부채의 혁명’으로 일컬을 수 있는 접선은 고려의 발명품이다.

단선은 나라나 문화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다. 구조상 만드는 방법, 재료, 사용 용도에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재료는 무척 다양한다. 종이를 비롯해 삼베, 비단, 공단 같은 천, 공작과 타조 등 각종 깃털, 오동나무, 대나무, 부들, 망사, 은, 상아 등 다양하다. 재료에 따라 공작선(공작 깃털), 오엽선(오동나뭇 잎)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 짧은 자루가 달린 방구부채는 주로 아녀자가 사용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단선을 우치와라고 한다. 우치와는 여성의 필수품이다. 일본 여성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얼굴 가리개로 자주 사용됐다.

부채의 혁명, 고려에서 시작되다

접선은 단선과 달리 한·중·일 삼국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모양에 차이가 난다.

사진: 담채화. 조선시대. 작자 미상. 35.3×53cm. 오른쪽 사진은 쌍학자수미선. ⓒ 블러그 갈무리
사진: 담채화. 조선시대. 작자 미상. 35.3×53cm. 오른쪽 사진은 쌍학자수미선. ⓒ 블러그 갈무리

접선의 한국식 이름은 쥘부채다. 부채질을 위해 쥘부채를 펴면 완전한 반원 형태가 된다. 일본의 접선인 센스(扇子)는 직각삼각형 형태다. 쥘부채에 비해 절반 정도 펴지는 것이다. 중국의 샨지(扇子)는 그 중간이다. 모양의 차이는 바람 세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센스나 샨지처럼 각지게 펼쳐지면 공기 저항이 생긴다. 당연히 바람 세기가 떨어진다. 똑같은 힘을 줬을 때 우리의 쥘부채가 바람 세기가 가장 강하다.

부챗살도 우리 것은 촘촘하다. 조선시대 부채는 변죽을 포함해 40개가 기본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 것은 성긴 편이다. 특히 가장 큰 차이는 부챗살 재료다. 우리나라는 대나무 겉대를 이용했다. 중국이나 일본은 대나무 속대를 썼다. 우리나라 부채는 한지로 한 겹만 붙여서 부챗살이 보인다. 중국과 일본 부채는 두 겹의 양지로 부챗살을 보이지 않도록 붙인다. 양 겹으로 붙여 부채의 끝자락이 두껍다. 부채 끝이 두꺼우면 바람을 밀어내는 힘이 떨어진다. 

쥘부채는 주로 선비의 필수 휴대품이었다. 아니 부채가 선비의 패션을 완성하는 소품이었다. 접선으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왕대나무를 사용 곁대 두 개를 붙여 부챗살 하나를 만든 합죽선, 옻칠한 칠첩선 등이 있다. 칠첩선을 들고 다닌다면 적어도 당상관(종3품) 이상 고관대작이다. 값진 칠첩선에는 다양한 선초(扇貂·부채의 장식)가 달리기 마련이다. 부챗살은 물론 부챗살에 붙인 종이나 천까지 옻칠한 검은 칠첩선은 왕만 사용할 수 있었다. 부채가 신분과 계급을 표시하는 물건이었다는 얘기다. 

과시욕은 계절을 타지 않는다. 장식용 부채는 여름만이 아니라 겨울에도 들고 다녔다. 송나라 문신인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인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부채를 들고 다닌다”라고 적었다. 겨울에도 지참하고 다니는 쥘부채는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부챗살이 모이는 선추(扇錘)에 다양한 장식을 매달았다. 이 장식을 선초(扇貂)라고 한다. 금, 은, 상아, 비치, 호박, 옥, 묵은 대추나무 등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이 사용됐다. 귀할 물건일수록 주목받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신분 과시를 위한 것이다. 비싼 것은 부채 하나에 쌀 한 가마니보다 비쌌다고 한다.

중국에 필묵화의 바람이 불다

조선의 부채가 중국과 일본에서도 꽤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부채는 중국과 일본에서 명품 중 명품이었다. 청나라 때 쓴 《천록식여》에는 ‘조선의 부채가 크게 유행하여 중국의 단선은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적혀 있다. 고려 부채 즉 ‘고려선(高麗扇)’도 마찬가지였다. 부채 장수는 고려선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소동파는 고려에서 만든 백송선(白松扇)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백송선은 흰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라는 뜻이다. 

네이버 블러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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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에 그린 그림과 글씨를 선면화(扇面畵)라고 한다. 선면화는 중국에서부터 시작됐다. 후한 말 최고의 사관이던 양수가 글을 쓰다가 실수로 조조의 부채에 먹물을 떨어뜨렸다. 기지를 발휘했다. 그림으로 먹물을 숨겼다. 이를 계기로 위진남북조시대부터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게 유행했다. 그 뒤에 부채는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한 캠퍼스가 됐다. 부채에 처음으로 글씨를 쓴 이는 왕희지다. 왕희지는 다리 모퉁이에서 부채 장수를 만났다. 누구도 부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왕희지는 부채에 5글자씩 써줬습니다. 왕희지의 글씨가 쓰인 부채라고 선전했다. 10배 값에 팔렸다. 글씨를 써준 다리를 ‘서예 다리’라고 한단다. 

부채는 유용한 선물이었다. 우리나라엔 공식적으로 부채를 선물하는 날이 있었다. 단오다. 단오에 주고받은 부채를 단오부채라고 했다.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속담도 있다. 왕도 단오에 맞춰 신하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관습이 이어졌다. 이를 단오사선(端午賜扇)이라고 한다.

부채와 일생을 함께하는 일본

부채 선물은 한·중·일 삼국의 공통문화다. 일본은 에도시대엔 부채를 새해의 상징으로 여겼다. 센스와 우치와를 서로에게 선물하며 장수와 행복을 기원했다. 그만이 아니다. 일본은 일생을 부채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채에 신성한 영이 깃든다고 여겼다. 신성한 영은 어린아이의 무병장수와 풍요로운 미래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이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행했다. ‘시치고산마이리(753詣り)다. 3, 5, 7살 생일에 기모노를 입혀 신사 참배했다. 이때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꼭 부채를 들게 했다. 

또 결혼이 성사된 예비부부는 상대에게 축복하는 의미로 부채를 보낸다. 헤이안 시대 때 혼인을 약속한 예비부부가 자기가 쓰던 부채를 상대에게 준 데서 유래한 풍습이다. 여기서 부채는 처녀, 총각의 동정을 의미한다. 부채는 결혼식에 사용되는 중요한 기물이다. 신랑 신부에게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이를 차선(遮扇)이라고 한다. 가린 부채를 치우고 얼굴을 드러낸다. 비로소 혼인이 성사됐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혼인 선약인 셈이다. 거기게 그치지 않는다. 옛날 초로, 반백, 환갑, 고희 등 의미 있는 생일잔치를 찾은 손님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장례식 하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채에 불행한 일을 예방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부채가 예절을 드러내는 물품이기도 하다. 손아랫사람이 부채를 무릎 앞에 가로놓고 앉는다. 이는 아랫사람이 예의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 예법이 다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무릎 앞에 부채를 놓고 차를 마시면 겸손한 행동으로 여긴다. 부채의 대국, 일본은 결국 문화가 만들었다.

중국에서 부채는 그 자체가 결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채의 ‘扇’과 성씨의 ‘姓’의 발음이 ‘샨’으로 같은 데서 유래된 것이다. 결혼만이 아니라 장례식에도 부채가 등장한다. 중국인은 상을 당하면 문 앞에 흰 부채를 걸어 둔다. 이것이 바로 상가임을 알리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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