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에 필승비용(必勝非勇)이라 말이 있다.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게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는 의미다. 물러설 줄 아는 게 진짜 용기라는 뜻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지면서 이기는 지혜’를 모른다. 어쩌면 졌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아직도 이준석과 김기현 전 국민의힘을 무너뜨리던 상황인식에 머무는 듯하다.

일관되게 윤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변화를 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마치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우겨대는 것 같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지난 22대 총선에서 참혹하게 패배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권은 없다”, “국민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라며 “국민을 존중하겠다”라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추락한 여론을 무시하는 대통령의 원대한 비전을 필자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패배의 지혜는 실패를 인정할 때부터 쌓이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참패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이기려고만 한다.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도도한 민심에 맞서고 있다. 민심은 어떤 정권에게도 진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정권만은 예외로 여기는 듯하다.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추락한 민심을 곧 멈출 소나기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권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게임이다. 정책과 메시지로 국민의 마음을 사는 게임이다. 게임의 도구는 정책 비전과 대국민 설득이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솔직함이다. 진정성이다.
여론조사는 그 게임의 중간 평가이자 설득의 효과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민심이다. 국정 지지도가 낮으면, 국정운영의 방식을 바꾸고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설득의 방법도 재고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민심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국정운영 능력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윤석열 정부는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추석 이후 발표되는 여론조사는 여론조사 기관별 최저치 신기록을 갱신 중이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임덕에서 데드덕으로 가는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은 “우리 사회 구조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반개혁적 저항에 물러서지 않겠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 윤석열 정권은 아예 지는 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과이불개(過而不改)'다.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다.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면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문해력’의 부족이다. 민맹(民盲) 수준이다. 국민의 뜻을 읽을 줄 모른다. 국정의 잘못과 오류를 지적한 여론을 무시한다. 국민은 윤석열 정부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강서을 구청장 보궐선거, 4·10총선, 그리고 7·30 전당대회가 그것이다.
윤 대통령의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명령에 따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듯 지나가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승벽(勝癖)’이 고질병이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질병의 한 가운데 김건희 여사가 있다. 김건희 리스크 문제만 나오면 윤 대통령은 외면한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작아진다. 아니 '친윤'이라는 사람들은 “김건희 여사를 악마화하고 있다”라고 역정을 낸다. ‘김건희 의혹’이 없었던 듯이 대처하는 것이다. 윤 정권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이유를 도외시한 대응이다.

마치 김건희 여사가 국격을 높이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존경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모든 국민에게 공개된 디올백 수수에 대해서도 조차 공식 사과나 문책도 없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 공직을 출세 수단으로 이용한 김대남이 제기한 공천 개입, 인사개입, 국정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 못 하는가.
그들이 겨냥하는 곳은 김건희 여사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참모도 대통령에게 직언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사실확인조차 못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다가 해명이라고 내놓은 게 즉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의 입지는 좁아졌다.
국민은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국민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남편을 이용해 호가호위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김건희 여사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앞으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정국은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김건희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무조건 따르라 식의 용산 대통령실 태도는 대중의 분노를 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면타개의 유일한 기회를 가진 사람으로 지목되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소매를 걷고 나섰다.
용산을 향한 한 대표의 발언 수위가 매일 높아지고 있다. 김건희 여사의 사과와 공개 활동 자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법 처리를 전제한 검찰의 기소 → 김건희 라인의 인적 쇄신 등으로 발언 수위 높이고 있다. 윤 정권이 민심에 부응하라는 압박이다. 이런 한 대표의 요구를 야당식으로 해석하면 ‘윤석열 심판’이다.
특히 김건희 리스크에는 국정농단 의혹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이라면 이 사안의 폭발력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 대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 문제를 언급했다. 본격적으로 윤 대통령과 차별화를 선언한 것이다.
용산 대통령실은 한 대표의 스탠스에 대해 ‘내부 총질’, ‘자해적 발언’으로 인식하고 있다. 보궐선거를 앞두고 야당을 도와주는 행동이라는 비판한다. 윤 대통령도 과연 다시 한번 한 대표에게 질 수 없다는 결기를 드러낼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하는 게 될 것이다. 우선 한 대표는 ‘민심의 대표자’를 자임했다.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민심의 눈높이에 맞게 부응하라”라는 것이다. 특히 김건희 리스크의 성격이 종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디올백 수수, 주가조작과 같은 개인적 이탈의 문제가 아니다. 공천 개입, 인사 관여, 국정 개입 등 국정농단 수준이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의 요구를 모두 거절한다면 국민과 충돌하는 형국이 된다. 여기에 야당은 김건희 특검법 재의결과 상설특검으로 압박하고 있다.
한 대표로서도 정치적 계산법이 깔려 있다. 단지 국민의 경고를 무시하는 정권에 민심을 일깨워주려는 것은 아니다. 한 대표는 그동안 수세로 밀리던 상황을 일거에 역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한 대표는 10·16 보궐선거를 지휘하는 선거사령탑이다.
한 대표로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니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겨야 한다. 그만큼 절박하다. 패배하면 책임론이 불거질 것이다. 미래권력으로 도전할 기회조차 잃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한 대표로서는 명운을 걸고 김건희 리스크를 정면 거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의 지지만 있다면 의회 주도권이 야당에 있는 여소야대여도, 정부에 반기를 드는 여당 대표가 있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정치평론가 사이에서 이 정도면 ‘심리적 탄핵’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실정이다.
사실상 국정운영을 할 수 없는 통치불능 상황이라는 의미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국민의힘에서 윤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윤 대통령 스스로 국민의힘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반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이 있다. 최고 국정 책임자로서 아내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면 된다. 공사를 구분하는 것이다. 한 대표에게 져줘야 한다. 이는 한 대표에게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승리를 안기는 것이다. 한 대표가 민심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앞의 작은 승리가 더 큰 패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국민은 냉정하다.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엎을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국민을 이기려 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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