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대만 역사를 살펴보니..
[ 뉴스프리존]김소영 기자= 대만인들은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식민지 통치자들이 돌아갈 때 대만인들이 항구에서 울었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중국과의 통일과 일본에의 병합 중 선택해야 한다면, 많은 대만인들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이는 한국인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다.

대만인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1. 대만은 역사적으로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1624년 네덜란드는 가오슝과 타이난 지역에, 1626년 스페인은 타이베이 지역에 진출해 설탕 농장을 건설했다.
1642년 네덜란드는 타이베이의 스페인 동인도 회사를 점령하고 대만 전역을 지배했다. 1662년에는 청나라와 대립하던 명나라 장군 정성공이 대만에 도착해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지배를 시작했다. 1683년 정성공과 그의 아들이 사망한 후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해 212년간 통치했다. 중국이 대만을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기의 지배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으며, 일본은 50년간 대만을 식민지로 통치했다. 한국에서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1995년에 철거되었지만, 대만은 여전히 대만총독부 건물을 총통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을 접수하고,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한 후 1949년 타이베이로 수도를 옮겼다.
대만은 네덜란드, 스페인, 명나라 장군, 청나라, 일본, 국민당 정부 등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는 수천 년간 독립 국가를 유지한 한국과 대조된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설탕 농장을 운영해 유럽에 설탕을 공급했고, 명나라 장군과 국민당 정부는 대만을 본토 회복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대만을 식민지로 운영했다. 어느 세력도 대만인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다.
1945년 대만에 도착한 국민당은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다면 대만 주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1947년 2·28 사건은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연상시키며, 약 3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1949년에 시작된 계엄령은 38년 후인 1987년에 해제되었으며, 2·28 사건의 규모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허가받지 못한 담배 노점상에 대한 경찰의 폭력이었고, 근본적인 원인은 1945년부터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군대의 부패와 폭력적인 통치였다. 본토에서 온 권력자들과 이권을 장악한 외성인과 기존 대만에 있던 본성인 간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유화적인 태도로 시간을 끌던 국민당 대만 정부는 진압을 위해 본토에서 증원군이 도착한 3월 8일부터 유혈 진압을 시작했다.
대만 사람들은 이전 지배자들과 비교해 일본이 도로, 철도, 전기, 항만,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교육 제도와 생활환경을 개선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인이라면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대만인들은 여러 지배자들을 비교한 결과 그렇게 평가한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정도와 일본의 통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대만에도 항일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1915년 타파니 사건(무장봉기) 등 소규모 무력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저항은 제한적이었고,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 주민 간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대만인들은 개선된 인프라와 생활, 감소한 해적 활동으로 인한 치안 개선에 만족했다. '외부인의 지배'에 대한 감수성이 한국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2. "일본이 필요하다(?)"
대만 정부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유지하다가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이후, 대만은 일본(1972년), 미국(1979년), 한국(1992년) 등 여러 우방국들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위한 조건으로 대만과의 단교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는 대만 외교부가 없으며, '대표부'가 비자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대만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는 현재 13개국에 불과하며, 아프리카에서도 수교국이 감소하는 추세이다.
▶ 맺으며,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모든 대만인에게 해당되지 않으며, 대만 사회는 중국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특정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요인들이 대만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역사적, 정치적 요인: 대만과 중국은 복잡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1949년 중국 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후퇴했다. 대만은 독립된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왔으며, 스스로를 독립된 국가로 인식한다. 반면 중국은 대만을 자신의 일부로 간주하며, 이는 양측 간의 정치적 긴장을 낳고 있다.
정치 체제의 차이: 대만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반면, 중국은 일당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과 체제의 차이는 가치관과 시각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일부 대만인들은 중국의 정치 체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낸다.
문화적 정체성: 대만인들은 자신들의 토착 문화와 중국 전통, 그리고 다른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일부는 대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중시하며 중국의 영향을 문화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경제적 경쟁: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대만 기업들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압박을 느끼고 있다.
국가 안보 우려: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는 대만인들이 중국 정부와 중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대만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대만 사회 내에는 중국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이들도 많다.
◇ 대만의 반도체 개발, 그리고 마무리
전 세계가 대만의 반도체 산업에 주목하는 가운데,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특히 D램 분야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PC와 휴대폰에 필요한 고부가가치 비메모리 반도체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설계 전문 기업을 지원하고 테크노파크를 조성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높은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 기술을 보유한 대만의 산업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정부와 학계 연구팀이 대만을 방문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 사쿠라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올해 일본의 반도체 수입 시장에서 대만산 반도체가 한국산을 추월했다고 보도했다.
대만은 약 2천 4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 과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불렸으며, 현재는 인공지능 시대를 선도하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비행기로 약 2시간을 날아 대만을 거쳐 다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님과 25명의 동기들과 함께한 여행은 '아름다웠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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