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고 행복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 자연 한 일이 아닙니다. 다 인연과보(因緣果報)에 의한 만남일 것입니다. 우리 덕화만발 가족으로 만난 도반 동지의 인연, 하늘에서 정해주는 혈육의 인연, 그리고 숙명으로 만나 우리가 선택하는 인연 등이 있지요.
우리가 선택하는 인연 중에 인생 최고의 만남은 남녀가 평생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숙명일 것입니다. 약 70년 전 실화입니다. 다리를 건너던 허공 스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세웠습니다. 냇가 갈대숲에서 “으아~앙” 고고성(呱呱聲)이 들렸기 때문이지요.
스님이 달려갔더니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혼절해 누워 있는데, 갓난아기가 탯줄을 매단 채 바둥 거리고 있었습니다. “네 놈은 누구냐?” 실성한 산모는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눈을 감았습니다.
어미의 하혈에 새빨갛게 물든 아기를 안아 탯줄을 끊고, 냇물에 씻기니 고추를 단 놈이 사지를 바둥 거립니다. 죽은 산모를 산 자락에 묻어주고 바랑 망태에 아기를 넣고 동네로 가 젖 나오는 산모를 찾았습니다. 이튿날부터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젖 동냥을 하는 게 허공 스님의 일이 되었지요.
3년이 흐른 어느 날 새벽, 아이 울음소리에 나가보니 암자 밖 돌계단에, 강보에 싸인 아기가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이리저리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팔자인가.” 허공 스님은 긴 한숨을 토하며 아기를 안고 암자로 들어갔습니다.
강보를 열어보니 딸아이였습니다. 네 살 먹은 동자 승 ‘허 암’은 제 앞가림을 하고 가벼운 심부름도 해 허공 스님이 아기를 안고 동네에 젖 동냥을 나갈 때 혼자서 암자를 지켰습니다.
춘하추동은 속절 없이 암자를 거쳐 어언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열다섯 살 허 암은 나무를 해오고, 무너진 담도 고치며 궂은 일을 다했습니다. 열 두 살 ‘허연’은 부엌일을 도맡았지요. 허공 스님은 늙은 몸을 가누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암자 처마 밑 쪽 마루에 앉아 봄 햇살을 쪼이고 있던 허공 스님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나무 한 짐 지고 오는 허 암 뒤로 허연 이 산나물을 가득 담은 소쿠리를 이고 졸졸 따라 들어왔습니다. 허 암과 허연지 속세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정다운 오누이 모습입니다.
허공 스님은 흐뭇했습니다. 열다섯밖에 안 됐지만 허 암은 속이 넓고 불심도 깊어 동안거도 거뜬히 치러내 장차 이 암자를 지킬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허공 스님이, 산책하러 계곡을 오르다가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콸콸 흐르는 계곡물에 윗도리를 벗은 허 암이 네 발을 짚고 엎드렸고, 허연 이 허 암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지요. 승 복을 말아 올려 하얀 종아리를 다 내놓은 허연 이와 허 암이 낄 낄 거리며 물장구를 칩니다. 암자로 돌아오는 허공 스님의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풀벌레 요란하게 울어 대던 깊어가는 가을 밤. 소피를 보러 나왔던 허공 스님이, 문을 열다 말고 얼어붙었습니다. 등에 달빛을 인 누군가 부엌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발가벗은 허연 이, 부엌에서 목욕하고, 그걸 허 암이 훔쳐보는 것이었지요.
이튿날, 허공 스님이 앞서고 바랑 망태를 진 허연지 뒤따라 산 넘고 물 건너 30 리 떨어진 여승방(女僧房) ‘비슬사’로 갔습니다. 허공 스님만 암자로 돌아온 그 날 밤, 스님은 허 암 방에서 소리 죽여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만감이 떠올라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어느 날, 허 암이 스스로 면 벽 수도를 하겠다고 자청해 허공 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허공 스님이 들이민 바리공양이 그대로 나오기를 이레 째. 허 암은 쓰러졌습니다. 허공 스님 품에 안긴 허 암은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허 암은 한참 벌어지던 어깨가 바짝 좁아지고, 볼의 살은 쏙 빠지고, 나무 한 짐 지고 일어서 지를 못했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눈 녹은 물이 돌 돌 흐르고 살구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는 봄 날. 허공 스님은 새벽녘에 암자를 나섰다가 저녁나절 암자로 돌아오는데, 그 뒤에 허연지 따라오는 게 아닌가. 체면도 부끄러움도 내팽개치고 허 암은 달려가 허 연을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날 밤, 촛불 아래서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허 암과 허연 이 혼례를 올렸습니다. 이튿날 아침, 허공 스님은 묵직한 전 대(錢臺)를 내놓으며 “이 돈이면 너희들이 속세로 나가 터전을 잡는 데 크게 모자람이 없을 것이야.”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을 떠나보냈지요.
어떻습니까? 천생연분이란 이런 것입니다. 설사 백 천 겁(劫)을 지날지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세상에 일방적인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엔 상대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도반 동지의 인연을 맺어 아름다운 인생을 가꾸어 가면 어떨까요!
단기 4357년, 불기 2568년, 서기 2024년, 원기 109년 1월 9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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