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유독 ‘삼 세 번’이란 말을 즐겨 합니다. 무슨 일이든 세 번은 해 봐야, 된다는 뜻도 있고, 세 번 정도 하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세상을 살면서 인생을 바꿀 기회가 세 번은 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옛날부터 3이란 숫자를 좋은 숫자로 여길 뿐 아니라, 많이 활용했으며, 이 숫자에도 숨어있는 의미가 아주 큽니다.

이 3이란 숫자는 1과 2가 합쳐 만들어진 것이며, 여기서 1은 양(陽), 2는 음(陰)을 뜻한다고 합니다. 《천부경(天符經)》에서는 하늘(一)은 사람(三)의 체(體)가 되고, 사람(三)은 하늘(一)의 용(用)이 되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한 몸이 되는 삼 신 일체(三神一體)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를 삼 신(三神) 혹은 삼극(三極)이라고 하고, 이 삼(三)의 조화로 우주가 돌아간다고 보고 있지요.
즉, 一과 二는 음 양이 합쳐진 숫자이기 때문에, 음 양이 하나로 되어 생물학적으로는 자손의 생산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삼신할머니’라고 하는 세 명의 신(神)은 아기를 점 지하고, 낳게 하며,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도 세 이레(三七日) 금 줄을 쳐 접촉을 막게도 했습니다.
이처럼 3의 의미는 단순한 숫자보다는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숫자 중 <3> 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만세도 언제나 세 번을 불러야 하고,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삼 세 번을 하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며,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었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였지요.
그 뿐인가요? 시집살이 하려면,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은 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삼 세 번은 일상의 삶에서, 사회 규범이나 정치, 문화에도 적용됩니다. 잘못도 보통 두 번까지는 용서해도, 세 번째 잘못은 용서하기 힘들지요.
법정에서 판사가 선고할 때도 방망이를 세 번 두들기고,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나 부결되어도 의사 봉을 세 번 칩니다. 이처럼 3이란 숫자는 완성 또는 종결의 의미가 강합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라는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세 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이지요. 세 사람이 서로 짜고 호랑이가 있었노라고 거짓말을 하면 안 속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원불교 수행 법도 <삼 학 팔조(三學八條)>입니다. 인격 완성의 세 가지 공부 법인 정신 수양(精神修養) · 사리 연구(事理硏究) · 작업 취사(作業取捨)를 삼학이라 합니다. 그리고 삼학을 촉진 시키는 신(信) · 분(忿) · 의(疑) · 성(誠)과 삼학 수행에서 버려야 할 불신(不信) · 탐욕(貪慾) · 나(懶) · 우(愚)를 합하여 팔조라 하지요.
<삼학>은 원불교의 종지(宗旨)인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신앙하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수행 법으로 진리 성과 사실 성을 기본 성격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정신 수양의 경우입니다.
정신이란 마음이 뚜렷하고 고요하여 분별 성과 주 착 심이 없는 경지를 지칭하는 것이고, 수양이란 안으로 분별 심과 주 착 심을 없이 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境界)에 끌리지 아니하여, 뚜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함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리 연구의 경우입니다. 사(事)는 인간의 시비 이해(是非利害)를 말하고, 이(理)는 천 조의 대소 유무(大小有無)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대소 유무의 대(大)는 우주 만유의 본체, 소(小)는 만 상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는 것, 유무는 춘하추동 사 시 순환과 풍우(風雨) 등, 만물의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의 변태를 이르는 것이며, 연구란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함을 뜻합니다.
셋째, 작업 취사의 경우입니다,
작업은 무슨 일에나 눈 · 귀 · 코 · 혀 등의 감 관 기관이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취사는 정의를 취하고 불의를 버림을 뜻하지요. 팔조 가운데 ‘신(信)’은 믿는 마음으로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고, ‘분(忿)’은 분발하는 마음으로서 용 장(勇壯)한 전진 심을 말하며,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권 면, 촉진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의(疑)’는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 알고자 함이며, 만사 만 리를 이루려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입니다. 또한 ‘성(誠)’은 간단 없는 마음으로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원동력이며, 불신은 믿지 않고 만사를 결정하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또 ‘탐욕’은 모든 일을 상도(常度)에 벗어나 과하게 취하는 것이고, 나(懶)는 만사를 이루려 할 때 싫어하는 마음이며, 우(愚)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대소 유무와 시비 이해를 알지 못하고 자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삼 학 팔조 공부로 인격을 닦고, 매사 ‘삼 세 번’을 생각하며, 전생, 금생, 내생 삼생(三生)을 지혜롭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기 4357년, 불기 2568년, 서기 2024년, 원기 109년 1월 16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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