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역사 속의 태극기’
서울시가 지난달 광화문광장 국가상징 공간 조성계획을 내놨다.
이곳에 사업비 110억 원을 들여 높이 100m의 ‘대형 태극기’를 게양대를 건립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각에서 ‘애국심 강요’, ‘국가주의적 발상’, ‘권위 시대로의 회귀’라고 주장했다. 비판에 부딪힌 ‘광화문의 대형 태극기’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하지만 국가상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졌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물이다. 국가의 존재를 나타낸다. 그런 태극기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국가상징 공간(광화문)에서 휘날리도록 하는 게 무슨 문제일까. 정작 문제는 태극기를 국가주의를 내세워 국민 인권을 침해하거나 태극기를 정파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닐까. 차기 대선의 유력한 주자 중 한 명인 오세훈 시장의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건축은 정치인이 가진 가장 강력한 미학적 무기”(G. 버나드 쇼)이니깐.
보다 본질적 질문을 해보자. 공공건축의 특징은 무엇일까. 상징과 직감이다. 광화문의 상징물은 무엇일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거기서 우리는 어떤 직감을 받는가. 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꼭 광화문에 거대한 국기 게양대가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태극기에 관한 생각은 114년 전 8월 29일로 돌아갔다. 경술국치일이다. 나라를 빼앗긴 날이다. 대구 달성군, 충남 예산군 등 기초단체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태극기 조기 게양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날의 수치를 잊지 말자고 다짐이다. 종전에 없던 새로운 태극기 물결이다. 이를 보면서 태극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역사 속의 태극기’에는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태극기 역사는 한민족의 정체성이고 자존심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는 1882년에 만들어진 태극기다. 그 이전에는 국기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의미도 몰랐다. 어기(御旗)가 국기를 대신했다. 어기는 태극 팔괘기다.
1875년 운요우호(운양호) 사건의 빌미가 된 게 국기입니다. 쇄국 정책을 펴던 조선이 영해를 침범한 일본 운요우호에 발포했다. 일본은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어선에 왜 포격을 가하느냐’며 트집을 잡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講和)조약을 맺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조약인 강화도조약이다. 조선의 대표는 조인식에 국기를 준비 못했다. 공식적인 국기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또한 망신거리가 됐다. 일본 대표는 “귀국의 국기는 어디 있느냐”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나마 국기가 나라의 얼굴이라는 자각이 생기게 된 기회가 됐다.
태극기 종류가 많아진 이유
국기 제작을 하려고 하자 청나라가 끼어들었다. 중국 관리 마젠충(馬建忠)은 “독립국이면 마땅히 국기가 있어야 한다’라며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린 삼각형 기발’을 ‘제안’했다.

네 개의 발이 달린 용을 그려 넣은 청나라 황제기(국기)를 모델로 삼으라는 압박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종주권 유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두 번째 조선의 국제조약은 1822년 맺은 조미수교통상조약이다. 청나라 주선으로 미국과 맺게 된 조약이다. 마젠충이 조선 측 통역을 맡았다. 고종은 총리대신인 김홍집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다.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디자인을 맡겼다. 어기인 태극 팔괘도를 응용한 첫 국기가 만들어졌다. ‘이응준 국기’는 흰색 바탕에 청홍의 태극 문양을 그리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리 4괘가 그려져 있다. 이것이 태극기의 모태가 됐다.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미국 측 협상 대표였던 로버트 W 슈펠트 제독은 <조미조약체결사>에서 ‘조선 국기는 이 조인식을 위해 함상에서 급히 제작됐다’라고 적고 있다. 이 태극기는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 조인식에서 게양됐다. 슈펠트 제독이 조인식이 끝난 뒤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 깃발은 같은 해 7월 해군 서적 <해상 국가들의 깃발들>에 ‘COREA Ensign’라는 이름으로 수록됐다.
조선은 두 차례의 국제조약을 맺으면서 국기의 필요성을 알게 됐다. 1883년 3월 6일 정식으로 국기가 제정되어 공포됐다. 하지만 국기 제작에 관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았다. 태극 문양과 사괘 위치는 그리는 사람마다 각기 달랐다. 1944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정한 국기 양식을 마련했다. 하지만 국내까지는 전파되지 않았다. 1949년 오늘날 태극기의 모양이 확정되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수십 종의 태극기가 있게 된 사연이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나름의 의미를 가진 태극기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기는 일명 ‘데니 태극기’다. ‘데니 태극기’는 고종이 1890년 외교 고문인 미국인 오언 데니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것을 데니의 외손자인 윌리엄 롤스턴 1세가 소장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가 1981년 환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 국기는 고종의 궁궐 내 행차 때 사용된 것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는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다. 2009년 5월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발견됐다. 승려들이 3·1운동 등에 참여하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태극기의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 문양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극일의 정신을 담은 것이다.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에는 광복군을 비롯한 동지의 의리와 자유 열망, 독립 의지가 서명되었다. 광복의 환희와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민족 자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태극기에 담았다. 태극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만든 ‘태극기 목판’도 있다. 이 목판은 3·1운동 때 사용됐다.
일장기조차 전범 처리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렇다면 일본 국기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일장기도 태극기 제작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겪는다. 우리 국기가 어기인 태극 팔괘기를 변형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일장기의 원형은 가마쿠라 막부 때 만들어진 어기, 즉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에서 힌트를 얻었다. 니시키노미하타는 화려한 비단에 노란색 내지는 금색의 원이나 국화 문장이 들어간 형태였다. 물론 금색의 원은 태양을 상징한다. 일본 건국 신화에서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이 일본 왕이다. 당연히 일본인도 태양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일본이 1858년 미국과 수교통상조약을 맺을 때 니시키노미하타를 변형, 일장기로 만들었다. 일본인은 이를 히노마루(日の丸) 혹은 히노마루노하타라고 부른다. 일장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뒤 독일이 나치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처럼 한때 사용이 금지됐다.
하지만 하켄크로이츠와 달리 다시 국기로 인정됐다. 미국의 일본 전범 처리는 독일과 달랐다. 일본의 국기 제정을 위한 논의를 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일본인 사이에도 전쟁 과정에서 쓰인 일장기를 그대로 쓰는 의견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대립했다.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결국 1999년에 일장기가 공식 국기로 승인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일장기가 일본 국기로 사용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국기 결정이 나지 않자 점령군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55년 결론이 날 때까지 잠정적으로 사용할 것을 허가한 것이다. 이는 관례로 일장기가 국기로 용인되어왔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상징은 일장기 말고도 교쿠지쓰기(旭日旗)가 있다. 일장기의 붉은 태양 주위에 욱광(旭光·아침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형상화한 깃발이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 선봉에 섰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기이다. 태양 주변에 빗살이 8개 있는 것은 육군기, 16개 있는 것은 해군기이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육군과 해군에서 군기로 사용되었으며 문양은 군국주의를 상징한다.
일장기와 욱일기 메이지 이후 하급 사무라이가 관료가 된다. 고급 사무라이는 군인으로 남은 경우가 많았다. 전직 고급 사무라이는 정부 관료를 우습게 봤다. 자기들이 만든 욱일기를 일장기 대신 사용했다. 1870년에는 육군이 먼저 만들었다. 당시에는 육군이 해군보다 중요했다. 전선이 넓어지면서 해군은 힘이 세졌다. 국방부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졌다. 1889년 해군기를 따로 만들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