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석 현상의 나비효과 ②] 이준석의 등장은 기성세대의 위기
부모세대보다 뛰어나지만 열패감에 내몰리는 청년세대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은 화가 나 있다. 기성세대에 화가 나 있고, 각박한 사회 시스템에 화가 나 있고, 두 번째 기회가 없는 비정함에 분노가 쌓였다. 부모세대에 화가 나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불의에 맞서 반기를 든 세대는 청년세대였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은 이런 불의에 과거의 청년들처럼 반기를 들 힘도 세력도 없이 그저 바쁘기만 하다. 취업전선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정의감보다는 당장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가 더 중요해졌다. 그게 현실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분노와 열패감으로 인해 기계적 공정에 더 주목하는 청년들은 이른바 상위 10퍼센트에 드는 청년들이 아니라 나머지 90퍼센트에 들어가는 청년들이다. 어차피 능력주의로 목표를 달성한 10퍼센트는 불만이 없다. 실패했다는,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나머지 청년들이 분노한다.
실패한 청년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부모세대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똑똑하고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지만 기회가 없을 뿐이다. 이전 세대는 적당히 공부하고 대학을 안 가도 취업걱정이 없었지만 지금 청년들은 일터에서 굳이 필요도 없을 학위와 자격증을 수집해도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다. 자신을 혹사 시켜 더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청년들은 신물이 나 있다. 그래서 차라리 달관(達觀)한다. 삼포세대, N포세대, 달관세대, 지금 청년세대의 다른 이름이다. 정말 청년들이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그래서 청년들의 분노의 화살이 기성세대, 즉 부모세대를 향한다.
어른들의 구태의연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비하하는 ‘꼰대’라는 말, 과거에 자신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힘들었다며, 젊은 세대의 노력이 부족하다며 무시하는 태도를 비하하는 ‘라떼는 말이야’, 자신의 나이를 빌미 삼아 젊은 사람들을 훈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어기는 노인세대를 비하하는 ‘틀딱’ 등의 표현은 무능하면서도 기회를 주지 않고, 훈시만 하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은 그냥 옛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요즘 청년들은 전쟁세대,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와는 사고 자체가 다르다.
오늘날 청년들은 정치, 경제, 사회 영역에서 비주류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잘나가는 청년들도 당연히 있다.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고, 나스닥에 상장하며, 세대 변화에 사인(sign)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 박탈감, 자기학대, 그리고 분노다. 그래서 이준석은 대한민국의 정치 변화, 세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준석 말고도 청년 정치인들이 있는데 왜 하필 이준석일까. 이준석이 청년들의 불만 표출에 어떤 지점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리라. 이준석이라는 청년의 정치적 철학과는 상관없다. 이준석이라는 청년의 정치적 언어에 자극 받는 것이다.
수권정당의 대표가 되었으니 그 상징성만으로도 정치 변화, 세대교체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은 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준석의 당선에 2030 청년들, 특히 20대 남성의 기대가 가장 컸다. 이준석의 등장은 기성 정치권에 지각변동을 알렸다. 기성세대가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석이 당대표 후보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없었다. 기껏 해야 청년비례를 늘리거나 비대위원 또는 지명직 최고위원 자리로 시혜를 베푸는 정도였다. 정치권에 청년이 들어갈 수 있는 높은 진입장벽은 여전히 변함없다. 꽉 막힌 제도도 그대로다. 기성세대가 특별히 발탁해주지 않는 이상 기회가 없다. 청년들은 구조적으로 진입장벽에 막혀 있다.

이준석이 당대표로 당선되자 민주당은 물론 각 정당을 비롯한 사회 전체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세대교체, 시대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청년정치, 청년을 위한 정치가 화두였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여전히 평균연령이 높다. 제21대 국회의원 300명 평균연령이 56.5세다. 국민 전체 평균연령 43.7세에 비해 무려 12.7세, 열 두 살이 더 많다. 한마디로 국회가 국민보다 늙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국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 성별, 연령, 직업 등에서 국민을 골고루 대표하지 못한다. 이준석이 당대표로 등장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이준석의 경험 부족과 어린 나이를 문제 삼았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정치인들의 사고 자체를 문제 삼았다. 경험과 경륜은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대변화를 수용하는 대신 변화에 저항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청년들이 이렇게라도 정치적 대표성과 권한을 가질 수 있고, 젊은 정치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이준석의 ‘능력주의’ 철학에 대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에게 그건 둘째다. 당시에 나경원 후보가, 주호영 후보가, 조경태 후보가 당대표가 됐다고 국민의힘이, 그리고 대한민국이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 이준석의 등장에 대한 지나친 위기의식의 발로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실제로 당시 정치권에는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당의 전신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이었고 20대 총선에서 이준석과 라이벌이었던 청년 이동학을 지명했고, 청와대는 청년 비서관 자리에 94년생 박성민 전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명했다. 이준석 돌풍이 일으킨 나비효과다. 그래서 정당을 떠나, 정치철학의 유무를 떠나 그 위치에 청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그래서다. “젊다고 다 청년이냐”는 비난, “생물학적으로 어리다고 청년이 아니”라는 비난은 의미 없다. 그런 비난은 청년들을 발굴해서 기회를 준 이후에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준석에게는, 청년 정치인들에게는 동시에 큰 책임이 있다. 잘 해내야만 한다. 이준석이 청년 정치인의 교과서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2의 이준석이 민주당에서도 나오고 정의당에서도 나와야 한다. 물론 청년의 몫을 얻기 위한 길은 여전히 험난할 것이다.
/조경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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