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익구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1960년대 후반 어느 여름, 따가운 햇살은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 동네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은 그 소리에 우르르 몰려갔다. 아이들의 후줄근한 주머니에 돈이 있을 리가 없지만, 한 명쯤은 호기를 부리며 동전을 꺼내는 아이가 있었다. 모두가 부럽게 바라보면 영웅이나 된 듯이 그 친구는 단물이 흐르는 꼬챙이를 잡고 으스대다가 반쯤 먹은 아이스께끼를 친구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아이가 충치가 있든 감기를 앓든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마치 놀이처럼 몇 명이 돌아가며 별미인 양 단물을 빨아 먹는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아이스께끼 장수는 주로 중·고생 정도의 청소년들이었다. 가끔 검은색 학생모를 쓴 형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배움은 뒤로 미루고 일찍 사회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10대들이 많았다. 칠 벗겨진 하늘색 사각 통은 긴 끈에 매달려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 번씩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쉬는 모습에서,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무게가 전해졌다. 통 속의 냉기 보존을 위해 얼음덩이를 가득 채워 넣었으니, 어깨가 어찌 아프지 않았겠는가.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 길게 뽑아 올린 ‘아’ 소리 다음의 '이'는 흘리듯 뒷소리에 붙이고, ‘스께끼’는 나지막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두 번째 소리는 '이'에 강세를 넣어 외치면 마치 장단을 타는 노랫가락 같았다. 그러나 쨍쨍한 볕 속의 그 소리는 결코 여유나 환희의 가락은 아니었다.
지금은 추억 속의 정겨운 소리 같지만 분명 그것은 삶의 무게에 지친, 허기진 오후의 외침이었다. 아이스께끼는 지금처럼 곱게 포장된 것도, 고소한 우유맛이나 향긋한 과일 향도 없었다. 사각이나 둥근 틀에 설탕물과 색소를 부어 얼린 얼음덩어리에 꼬챙이를 꽂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투박한 달콤함은 혀끝을 얼얼하게 하면서도 땀에 젖은 여름날의 갈증을 단번에 씻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혀에 닿으면 새콤달콤했지만 결국 설탕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늘어진 오후에는 더없이 시원한 청량제였다.
세월이 흐르며 아이스께끼는 크게 변했다. 초콜릿이나 바닐라가 더해졌다. 벽난로 앞에서 마시는 따뜻한 코코아처럼 포근한 감각, 듣기만 해도 이국적인 꿈을 불러오는 세련된 이름과 자태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아이스께끼는 잊히지 않는다. 어려웠던 시절의 빛바랜 풍경이자, 근심 없는 유년의 행복이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 단순한 얼음 조각이야말로 뜨거운 여름을 견디게 해 주던 소박한 위안이었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도 긴 탓인지 골목길 먼 끝에서부터, 주름이 깊게 팬 어른이 되어버린 그 아이의 가난에 찌든 목소리가 귓가에 다가온다.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 그 소리를 따라 달려가던 어린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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