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멈춤에 국가·지역 산업 흔들

“대한민국 전력계통 구도. 전국 345kV·765kV 송전망과 변전소, 발전소 분포를 나타낸 지도다. (자료=한국전력공사·전력거래소)”
“대한민국 전력계통 구도. 전국 345kV·765kV 송전망과 변전소, 발전소 분포를 나타낸 지도다. (자료=한국전력공사·전력거래소)”

국내 전력망 확충이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상당수 지자체가 지역 여론 악화를 우려해 인허가 판단을 미루면서, 국가의 산업·에너지 정책 전반이 교착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새만금·전북처럼 신재생에너지와 첨단산업을 핵심 전략으로 삼는 지역에서도 직격탄이 될 전망이다.

한국전력이 수립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추진 중인 송·변전망 54개 사업 가운데 이미 18개가 공식적으로 지연됐고, 정상추진으로 분류된 사업에서도 최소 12개가 추가로 뒤늦게 밀릴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주민 반발, 부지 확보 지연, 환경영향평가 조정 등이 반복되면서 전체 사업의 절반 이상이 ‘지연 가능’ 판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대표 사례는 강원·경북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보내는 핵심 프로젝트인 ‘동해안-수도권 500kV 송전선로’다. 당초 2019년 준공 예정이었지만 주민 반대와 부지 갈등이 장기화되며 사업은 8년째 멈춰섰고, 수도권 종점 역할을 맡을 하남 동서울변전소 착공도 지연돼 2027년 완공 계획의 신뢰도마저 흔들린 상태다. 최근 가까스로 완공된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가 계획 대비 12년 늦어진 점을 고려하면, 전력계통 사업의 구조적 병목은 이제 예외가 아니라 상수에 가까워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수용성에 맞닿아 있다. 전력 생산은 충청·강원·호남 등 비수도권에 집중되지만, 수도권이 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 속에서 주민들은 “피해는 지역에, 혜택은 수도권에 돌아간다”는 정서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여기에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지자체들이 민원 부담을 피하기 위해 인허가 결정을 미루는 사례까지 겹치면서, 송전망 확충은 ‘정치·사회적 난제’로 굳어진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선거를 앞둔 지자체가 갈등이 큰 사업을 밀어붙일 명분이 없다”는 현실적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이러한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9월 ‘전력망 특별법’을 시행하고 총 99개 전력망 사업을 국가기간사업으로 지정해 패스트트랙에 올렸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체감 변화가 없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법적 틀은 마련됐지만 중앙정부가 실제 갈등을 중재하고, 지자체와 주민을 설득하며, 인허가를 일관되게 끌고 가는 실행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전력망 지연은 결국 산업·에너지 전략 전체로 번지는 연쇄적인 충격을 야기한다. 정부는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NDC)을 확정하며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현재 36GW에서 100GW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밝혔지만, 전력망이 제때 따라가지 못하면 생산된 전기가 산업단지로 이동하지 못해 목표 달성은 어렵다. 강원권에서는 이미 동해안-수도권 송전선로의 장기 지연으로 석탄·원전·태양광·풍력 설비들이 생산한 전력이 계통에 온전히 연결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또한 안정적 전력 공급계획이 흔들릴 경우 산업 전체의 투자 타임라인이 지연될 수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전북에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새만금권은 RE100 산업단지, 대규모 해상풍력, 이차전지·수소 인프라 등 미래산업을 잇달아 추진하고 있지만, 이 생산 전력을 안정적으로 반출·소비할 송전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기는 생산되지만 팔 수 없는’ 계통 병목이 반복될 수 있다. 실제로 전북 군산·새만금권에서 추진 중인 345kV 송전선로 사업은 전략산업의 기반시설임에도 일부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는 통로”라는 인식 아래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 산업전환을 추진하는 전북 입장에서는 송전망 지연이 곧바로 지역의 성장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심각하다.

전문가들은 이제 단순한 보상금이나 설명회 수준을 넘어, 독일·일본처럼 ‘수용성 패키지’를 제도화한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독일은 지중화 우선 원칙과 절차 투명성을 강화했고, 일본은 변전소를 공공·문화시설과 결합해 지역 랜드마크로 만드는 방식으로 주민 반발을 줄였다. 국내에서도 서울 양재변전소를 문화시설과 결합해 갈등을 상당 부분 해소한 사례가 있다. 전북·새만금에서도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혜택, 지역 공동체가 참여하는 기여 시스템, 산업 전환의 이익이 지역에 환류되는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안 통과’가 아니라 실행 의지다. 선거를 앞둔 지자체의 인허가 회피와 중앙정부의 소극적 개입이 계속된다면, 재생에너지·반도체·AI 등 국가 기간산업의 경쟁력까지 흔들릴 수 있다. 전북과 새만금은 그 최전선에 있다. 산업 생태계를 끌어올릴 전력망이 제때 갖춰지느냐 여부가 지역의 미래를 가르는 결정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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