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김장철을 맞은 주부의 걱정은 커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배추와 무 등 주요 김장 재료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다만 고춧가루, 소금 등 양념 재료 가격은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지난해보다는 김장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게 지난 9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비용조사 결과다. 다행이다.
김장 김치는 우리의 중요한 겨울 양식이다. 김장철을 맞아 한·중·일 삼국의 김치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김치는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유사성과 차별성이 공존하고 있다. 김치는 기본적으로 절인 음식이다. 열대지방을 제외하고 어느 나라나 절인 음식은 있다. 하지만 절인 음식이라고 모두가 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채소를 절인 파오차이(泡菜)가 있다. 쓰촨 지방의 음식이다. 만드는 법이 우리 김치와 유사하다. 무와 배추를 소금에 절인다. 보통 백김치 형태로 먹지만 고춧가루를 넣기도 한다. 김치와 가장 큰 차이는 물기 없다는 점이다. 배추와 무 등을 그늘에 말린 뒤 소금에 절인다. 절인 무와 배추도 물기를 뺀다. 그 뒤에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킨다. 물기를 제거하는 이유는 쓰촨 지방 기후 때문이다. 쓰촨은 여름이 매우 덥고 습하다.
중국에 파오차이가 있다면 일본에는 오싱고가 있다. 오싱고는 무, 오이, 배추 등을 재료로 한 채소 절임을 통칭하는 말이다. 일본식 김치인 ‘기무치’도 오싱고에서 나온 것이다. 기무치는 매운 우리 김치에서 매운맛을 빼고 만든 일본식 김치라고 할 수 있다. 오싱고 역시 국물이 없는 게 특징이다. 국물의 유무는 결국 만드는 방법의 차이로 생긴다. 우리는 김치를 소금에 절인 뒤 물을 빼고 양념을 넣고 버무린다. 그리고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절인 소금이 삼투압 작용을 하면서 배추와 무가 머금은 물기를 내놓으면서 국물이 만들어진다.
한·중·일 세 나라는 김치의 종주권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종주권 논쟁은 중국의 도발로 유발된 것이다. 김치가 파오차이의 표절 음식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의 역사성을 내세웠다. ‘파오차이의 기원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역사가 깊다’라고 억지를 부렸다. 파오차이의 고향인 쓰촨만이 아니다. 중국 정부도 거들고 나섰다. 2010년 파오차이를 ‘국가농산품지리표시 보호식품’으로 지정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인정하는 무역 규범인 지리표시제(GI·Geographical Indication)는 일종의 음식(농수산물) 지적 재산권이다. 상품의 품질, 명성 또는 그 밖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지리적 근원에서 비롯되는 경우 나라, 지역, 지방을 원산지로 표시한다. 우리나라는 지리 표시제에 등록된 농수산물은 38개뿐이다. 귀한 만큼 대접을 받는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런 파오차이의 중국 브랜드화는 팀원 공정과 관계가 깊다. 팀원 공정은 주변 국가의 문화를 중국화하는 작업이다. 각 소수 민족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문화적·정치적 통합을 일방적으로 강제하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일본은 오싱코와 김치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오싱코는 우리의 백김치와 유사하다. 이 때문에 일본은 김치에서 고춧가루를 빼면 오싱고이고, 오싱고를 고춧가루에 버무리면 김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맛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싱코는 중화된 맛이다. 소금과 설탕이 융화되어 나는 순한 맛이다. 단맛이 강하다. 김치는 어우러진 맛이다. 매운맛뿐만 아니라 신맛, 단맛, 짠맛, 감칠맛 등이 어우러져 나는 맛이다. 이 맛은 국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국물이 없는 오싱코와는 전혀 다른 발효 음식이다.
우리나라 김치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순무 장아찌나 순무 절임에 가까웠다.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그로부터도 100년이 흐른 뒤다. 1715년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 배추와 무를 고추에 버무린 김치의 모습이 보인다. 그로부터 50년 뒤인 1766년 발간된 《증보산림경제》에는 41개의 김치가 수록되었다. 18세기 중엽까지 꾸준히 김치 다양화가 진행된 셈이다. 최근 조사된 김치의 종류는 무려 336가지다. 이를 재가공해서 먹는 음식도 50여 종에 이른다.
그 이전의 김치는 짠지에 가까운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절인 음식을 苧(저)라고 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苧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인은 젓갈과 절인 음식을 잘 만든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고문서에서는 苧가 漬(지)로 바뀌었다. 우리의 절인 음식이 중국과 다른 형태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짠지(漬)를 한자로 표기하면 沈菜(침채)다. 이것이 딤채, 김채로 변했고 나중에 김치로 바뀌었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배추와 무를 먹은 것일까. 무는 한나라 때 한사군에 의해 들어왔다. 무는 별명이 있다. ‘무후(武侯)의 채소’ 혹은 ‘제갈채’라고 한다. 제갈량이 순무를 군용음식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도 무를 ‘흙에서 나는 인삼’이라는 의미로 ‘토인삼’이라 불렀다. 음식 재료라기보다는 약재로 봤다는 의미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몸에 열이 많았던 정조는 세손 시절에 생무를 상식했다. 무의 약효를 암시하는 속담이 있다. ‘무가 있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 ‘무장수는 병이 없다’라는 게 그것이다.
배추는 중국 허베이성이 원산지다. 배추는 ‘채소의 왕’으로 대접받았다. 청나라 때 쓰인 《소식설략》에 ‘모든 채소의 왕’이라고 적고 있다. 백 가지의 채소가 배추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배추는 무보다 훨씬 뒤에 한반도에 들어왔다. 고려 시대다. 고려의학서인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배추라는 단어가 나온다. 경기도 지방에서 재배해서 4, 5월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배추도 무와 마찬가지로 약재로 쓰인 귀한 채소였다. 대중적인 음식 재료가 된 것은 100여 년 전 산둥배추가 들어오면서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그때도 마치 시금치처럼 속이 차지 않은 배추였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배추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육종학자인 우장춘 박사에 의해서다. 1950년대 우리 토양에 맞는 종자를 개발해서 전국적으로 보급됐다.
김치의 위대성은 발효 능력에 있다. 한국의 김치와 일본화된 김치, 즉 기무치가 2000년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 일전을 벌였다. 두 나라가 동시에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 발효음식으로 등록을 신청했다. 1984년 LA올림픽 김치가 공식 메뉴로 채택됐다. 정작 한국은 김치의 세계화에 엄두도 내고 있지 못했단 시점이다. 일본은 매운맛이 제거된 겉절이 형태의 기무치로 세계 김치 시장을 지배한 상태였다. 하지만 국제식품규격위원회는 한국 김치의 손을 들어줬다. 발효음식 국제규격에 합격판정을 내렸다. 일본에는 불합격 통지했다. ‘절인 배추에 양념을 섞어 숙성시킨 음식’의 이름을 ‘김치’로 통일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숙성되지 않은 기무치에서 추출된 젖산균이 김치의 166/1에 불과했다고 한다. 잘 익은 김치 1mL의 당 젖산균이 무려 1억 마리가 있다. 요구르트보다 4배나 많다. 젖산균은 바로 발효과정에서 만들어진 인간에게 유익한 균이다.
김치의 의학적 효능에 관한 연구발표가 이어지는 것도 이 젖산균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항암 효과, 다이어트 등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김치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쥐나 돼지 등을 이용한 임상실험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는 보도가 종종 나왔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의학계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물질’이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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