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문제로 2년 동안 내홍을 겪었던 대한복싱협회가 드디어 새 회장을 선임하고 순항을 시작했다. 지난달 27일 최찬웅 씨티건설 대표이사가 신임회장으로 선출되어 당선증을 수여 받으면서 복싱협회가 드디어 관리단체의 껍질을 벗겨내고 2년 만에 독립단체로 새 출발을 시작한 것이다.

최찬웅 신임 협회장(오른쪽에서 네번째)을 선출한 대한복싱협회(사진=연합뉴스)
최찬웅 신임 협회장(오른쪽에서 네번째)을 선출한 대한복싱협회(사진=연합뉴스)

최 회장은 2001년부터 15년간 울산 복싱협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부터 5년간 생활 복싱협회와 통합한 제1대 통합 울산복싱협회장을 지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공명정대한 판결로 더 이상 판정에 불이익을 당하는 전례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초점을 맞출 것이라 다짐했다.

특히 올해 개최되는 파리올림픽을 위해 원로분들의 고견을 받아들여 최대한 지원책을 마련해 한국복싱이 새롭게 탄생하는 출발점이 되도록 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최 회장의 임기는 4년이다.

2021년 회장 선거에서 가림 종합 건설 윤정무 대표가 단독출마해 당선됐지만 후보간 담합이 있었다며 선거무효를 주장하는 대의원들이 총회와 임시총회에 불참하면서 총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 결국 대한 체육회는 2021년 12월 관리단체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김승미 감독 조철제 원로회 회장 최찬웅 복싱협회 회장(우측)
김승미 감독 조철제 원로회 회장 최찬웅 복싱협회 회장(우측)

당선증 수여식 현장에서 조철제 원로회 회장 김승미 전 국가대표 감독을 포함 홍기호 이현주 정동환 고영삼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복싱인 들을 모처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또 1976년 동국대 창단 감독으로 부임 황철순 김정철 정용범 김광선 박진선 이훈 김석현 변정일 김재경 박종심등 수많은 명 복서들을 배출한 동국대학 김진영 선생과 1986년 12월 제36회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서울체고팀을 이끌고 출전, LF급 조동범. F급 전병성 FE급 김석현 LW급 최임곤 W급 나홍진 M급 전경준 등 6체급 체급을 석권 종합우승과 함께 최우수지도자상을 받은 이흥수 전 상무 감독도 참관했다.

김진영 선생과 이흥수 전 상무 감독(우측)
김진영 선생과 이흥수 전 상무 감독(우측)

현장에서 원로복싱인들을 보자 문득 맥아더 장군의 어록이 생각난다, 나이가 60이다, 70이다로 그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 할 수 없다. 늙고 젊은 것은 그 사람의 신념이 늙었느냐 젊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상 살수대첩 한산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고려를 구한 강감찬 장군도 그때 나이가 71세였다. 아무쪼록 새롭게 출범하는 대한복싱협회 최찬웅 회장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강흥원 대표
강흥원 대표

며칠전 강흥원 전 미들급 한국챔피언이 운영하는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 인삼 전문점 흥원 인삼을 찾았다. 강 대표는 이 곳에서 40년째 인삼을 취급하고 있다. 언제든 필자가 예고 없이 방문해도 큰 형님처럼 편안하게 맞아주는 복싱인 선배 중 한 명이 바로 강흥원이다.

그는 1972년 프로에 데뷔해 두 차례나 한국챔피언에 오른 강철 주먹의 권투선수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40년 세월 동안 매일 새벽 4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점포를 운영해온 강흥원은 1950년 전남 영광 출신이다.

'강 장사'로 불릴 정도로 천부적으로 체력이 뛰어난 그는 70년대 최중량급인 미들급에서 유제두 박종팔 주호 임재근과 일전을 펼치면서 8년간 25전 13승(8KO) 10패 2무를 기록, WBC 크루저급 3위에 랭크 된 복서다.

강흥원은 프로 대뷔전(1972년) 에서 1970년 제4회 아시아선수권(은메달) 국가대표 박남용과 대결, 1회 KO승을 거두면서 주목받는다.  이후 3승 3패를 주고 받은 두 선수는 1977년 12월 한국 미들급 타이틀을 걸고 마지막 7차전을 벌인다.

그리고 팽팽한 접전 끝에 뚝심으로 밀어부친 강흥원이 판정승을 거두면서 2번째 한국 미들급 정상에 오른다. 강흥원에 패한 박남용은 3승 4패로 균형이 깨지자 18전 11승 (4KO) 7패의 전적을 뒤로하고 링을 떠났다.

한국 미들급 챔피언 강흥원
한국 미들급 챔피언 강흥원

강흥원은 아쉬웠던 경기로 임재근, 주호와 벌인 3연전을 꼽았다. 이 두 복서는 강흥원과 함께 50년생 범띠 복서 3총사이다. 74년 2월과 10월에 29전 23승 (21KO) 1무 5패 전적의 임재근과 벌인 2연전에서 강흥원은 왼쪽 눈에 부상을 입고 TKO를 당했다.

당시엔 부상이면 무조건 규정에 의해 TKO로 처리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3회를 넘기지 못하면 그때까지 진행된 채점에 의해 승패를 결정하는 룰이 아니었다. 지금도 강흥원의 눈 부위에 그때의 상흔이 남아있다.

강흥원은 20전 15승(6KO) 2무 3패를 기록한 국가대표 출신 주호와 75년 10월 벌인 한국 미들급 타이틀 매치도 아쉬운 경기라고 한다. 주호에게 당한 슬립다운이 주심의 착오로 다운으로 인정되면서 결국 무승부를 기록했다.

강흥원 사장과 박종팔 챔프(우측)
강흥원 사장과 박종팔 챔프(우측)

강흥원의 25전 중 하이 라이트경기는 1978년 6월에 개최된 박종팔과의 타이틀전이다. WBA와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박종팔이 신인왕전에서 우수선수상을 획득 한지 얼마 되지않아 강흥원이 보유한 한국 미들급 타이틀에 겁없이 도전한 것이다.

당시의 강흥원은 복서로서 물이 오를대로 오른 전성기였다. 일본 오사카에 원정 아프리카 케냐태생의 피터 난보쿠를 라이트 일발로 4회 KO승을 거둔후 필리핀 챔피언 알베르토 쿠르즈를 판정으로 잡는등 4연승을 기록할 때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5전 4승(3KO)을 기록한 박종팔이 힘과 패기로 기세등등하게 강흥원을 몰아붙이자 강흥원은 로프에 기대어 수세에 몰린다. 그러나 종료 3초전 박종팔의 안면에 폭팔한 회심의 라이트 일격에 박종팔은 그대로 고꾸라진다.

이 경기는 박종팔의 복싱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이 경기 후 박종팔은 1978년 8월부터 1981년 11월 배네주엘라에 원정 홈링의 오벨메히야스 선수에게 8회 KO패할 때까지 3년 3개월 동안 동양 타이틀 10차 방어를 전부 KO승으로 장식 하는등 19연속 KO승 행진을 펼치며 동양의 무적함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강흥원 대표와 유제두 관장(우측)
강흥원 대표와 유제두 관장(우측)

1978년 12월 강흥원은 유제두가 보유한 동양 미들급 타이틀전 21차 방어전 도전자로 내정되어 일전을 펼친다. 주호와 경기를 마친후 5개월 만에 링에 오른 유제두는 3살 어린 강흥원을 상대로 일진일퇴의 접전 끝에 2대1 판정승을 거두고 방어에 성공한 후 링을 떠난다. 전 세계챔피언 유제두의 고별 경기에서 떠나는 영웅을 위해 송별식을 깔끔하게 치뤄 준 것이다. 

79년 5월 강흥원은 신설된 WBC 크루저급 3위에 올라 타이틀 도전자 결정전을 펼친다. 상대인 스즈끼 도시아끼는 85Kg으로 링에 올랐고 강흥원은 78Kg으로 맞선다. 이미 2차례 일본에 원정 시바다 겐지와 파터 난보구에 KO승을 거둔 강흥원은 결국 4회에 KO패를 당한다.

해가 바뀐 1980년 강흥원은 한창 떠오르던 태양 유병래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8년간 정들었던 링을 떠난다. 그리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LF급 국가대표인 장흥민의 소개로 만난 교육자 집안의 황복희 여사와 결혼, 경동시장에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를 친형처럼 따르는 장흥민은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복서다. 장흥민은 1984년 안동공고 체육 교사로 부임 33년을 근무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안동시 옥동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인생 3막을 보내고 있다.

한국체대 선후배 장흥민, 김종원선수(우측)

강흥원은 은퇴 후 자신이 소속됐던 경흥 체육관의 선수들 모임 회장을 맡으면서 통큰 씀씀이를 보이고 회원들을 친동생처럼 대해 주면서 맏형 노릇을 수행하고 있다. 경흥 체육관은 사설 체육관임에도 불구하고 황철순 김인창 장흥민 양설석 김종선 장한곤 김종원 오경묵 이방헌 등 엘리트 복서들을 쉼없이 배출한 명문 체육관이다.

김종원 관장도 한영고 한국체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B급 국내 정상급 트리오인 신창석 권달원 김성길을 연달아 꺽으면서 명성을 높였고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지금은 퇴계원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최초로 여자복싱 금메달(오연지)을 탄생시킨 지도자 장한곤은 2000년 인천에서 복싱강사로 재직하던 시절 개최된 소년체전에서도 출전한 제자들이 5체급을 석권하도록 이끈 진품명품 국보급 지도자다.

그런데 이런 능력 있는 지도자 장한곤 선생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2021년 동경올림픽에 대표팀 지도자로 승선하지 못했을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엄지손에 굳은살이 박힌 자만이 식탁 상석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갈파 했는데...

각설하고 명 지도자 장한곤을 배출한 경흥체육관에서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B급의 황철순과 LW급의 김인창이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들은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대회에 참가해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LF급 장흥민 B급의 황철순 L급의 김인창이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경흥 체육관의 위상과 명예를 드높혔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경흥 체육관의 산파역을 담당한데 이어 중심축을 형성한 강흥원 흥원 인삼 대표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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