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 때 최완일 FW1 프로모션 총괄대표가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했다. 1975년 의정부태생의 최완일은 경북체고 재학시절 곽귀근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LH급 전국선수권을 재패한 복서다.

FW1프로모션 최완일 대표
FW1프로모션 최완일 대표

1993년 호남대 재학 시절 청소년대표로 발탁된 최완일은 2006년 부동산개발회사를 설립, 사업가로 변신했다. 최 대표는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프로모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동관 김철완 장인수 등 한국 최고 유망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부동산 격언에 철길 따라 돈이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프로복싱도 유능한 프로모터의 발길 따라 챔피언 타이틀이 보인다. 왜냐면 프로복싱은 속성상 끝없는 비즈니스에 의해 챔피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시발점으로 박종팔 박찬영 서성인 장정구 백인철 이열우 문성길 김용강 최요삼 등 숱한 세계챔피언들의 탄생 이면에는 김현치 전호연 심영자 회장 등 트레이앵글을 구축한 프로모터들의 '인탠지블 파워(intangible power)' 가 크게 작용했다.

지금과 같은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혜성처럼 등장한 최완일 프로모터는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작금의 한국복싱의 미래를 환히 비추는 등불이라 생각한다. 

신우실업 김기식대표와 한솔병원 강동희 이사장(우측)
신우실업 김기식대표와 한솔병원 강동희 이사장(우측)

지난 주말 필자는 전 대한 실업 복싱연맹 부회장을 지낸 강동희 전 한솔병원 이사장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나고 자란 경기도 고양시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강동희 부회장의 선수 시절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호흡한 김기식 신우실업 대표도 합석해 모처럼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 두 분은 만나면 좋고 함께 있으면 더 좋고 헤어지면 늘 그리운 사람이 되자고 노래한 용혜원 시인의 글귀가 생각날 정도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절친이다. 1950년 경기도 고양시 태생의 강동희 부회장은 신우식 전 서울복싱협회 부회장, 김덕우 대한복싱 심판위원과 함께 새천년을 전후로 서울복싱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50년생 범띠 3총사다.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요계에는 조용필 임희숙 임성훈이 범띠 3총사이고 프로복싱계는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 이 범띠 3총사라고 필자가 말하자 강동희 회장은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강동희(남산공전)는 1966년 한국 복싱체육관에 입관, 복싱을 수학한다. 1955년 3월 창설돼 한국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노병렬 사범 휘하에서 40년을 이어온 한국체육관은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비롯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출신인 한수안 송순천 정신조 김덕팔 이문용 정동훈 김창석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이 연거푸 탄생시키면서 초창기 한국복싱의 산파역을 담당한 유서 깊은 체육관이다.

강동희 실업연맹 부회장 부부
강동희 실업연맹 부회장 부부

복싱 지도자는 제자를 쏘아 올리는 활이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더높이 더 멀리 날아갈수 있도록 힘껏 활시위를 당겨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 해줘야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병렬 사범은 위대한 지도자로 칭하는데 손색없는 인물이다. 

유소년시절부터 인근 야산에 올라 햄머로 바위 돌을 때리면서 단련해 파괴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강동희는 입관하면서부터 선수 7백명이 운집한 한국체육관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우월한 파괴력을 주무기로 4차례나 치룬  한국체육관 자체 평가전에서 당당하게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서울 신인대회(페더급) 출전한 강동희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1년 아시아선수권(테헤란)을 재패한 정영근 (중산체)을 비롯 57명이 출전한 페더급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이면서 5연승(4KO)과 함께 우승을 차지한다.

국제대회에서 2관왕을 달성한 정영근(중산체)의 16강전 탈락은 당시 선수층(Depth)이 두터웠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발판으로 강동희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을 포함 3차례 전국 무대에 출전했지만 파워 히터인 그의 강철 주먹을 솜 주먹으로 만든 컨택형 복서 김태호의 빠른 발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면서 고배를 마신다.

이동포 관장과 김창석 대한복싱협회 부심판장(우측).
이동포 관장과 김창석 대한복싱협회 부심판장(우측).

한편 강동희의 절친 신우식은 1971년 체육관 자체 평가전(밴텀급)에서 김창석에 판정패, 출전권을 양도한다. 현재 대한복싱협회 부 심판장에 재직 중인 김창석은 서울 신인 본선에서 파죽의 6연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를 발판으로 세계군인선수권을 재패한 이거성 (경희대)을 1973년 아시아선수권(밴텀급) 선발전 결승에서 꺽고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출전, 송순천 정신조 장규철로 이어지는 밴텀급 국가대표 계보를 승계한 간판 복서였다.

이런 이력을 보유한 김창석에게 "70년대 최고의 복서는 누구냐"고 묻자 강동희에게 3연승을 거둔, 창조적인 복싱을 구사하는 김태호라고 압축해 표현했다. 당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던 두터운 선수층을 재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

70년대 최고의복서 김태호 경기장면
70년대 최고의복서 김태호 경기장면

1971년 6월 기갑부대 하사관으로 입대한 강동희는 3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5년부터 결혼과 함께 새롭게 인생 2막을 시작한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강동희는 중구 북창동에서 주류사업에 투신, 색다른 경영 능력으로 사업체를 일취월장 번창시킨다. 아내의 치밀한 내조와 헌신적인 보조 역할 이 뒷받침되어 이뤄낸 부창부수의 결과물이었다.

사업에 성공해 견고한 입지를 구축하자 수구초심이 발동한다. 결국 그는 1992년 42살에 늦깍기 서울 복싱협회심판으로 복싱계에 컴백, 필자와 연연을 맺는다. 그리고 서울복싱협회 부회장직도 맡으면서 음지에서 조력자 역활을 수행한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절친 신우실업 김기식 대표를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으로 영입해 투톱을 형성한다. 2014년 어느날 강동희 부회장은 우연한 계기로 당시 한국체대 2학년에 재학 중인 복싱 유망주 김인규를 소개받아 졸업할 때까지 격려금을 지원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용기백배한 김인규는 그해 국가대표 1차 선발전 49Kg 급 결승에서 국내 아마복싱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2회 연속 메달리스트가 됐던 신종훈을 꺽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 김인규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 김인규

탄력을 받은 김인규는 201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복싱협회(AIBA) 세계선수권 52Kg급 8강전에서 인도의 카빈델 비스트를 꺽고 6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강동희 부회장의 성원에 보답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흘러도 강동희 부회장의 은혜를 잊지 않고 틈틈이 안부를 전하는 올곧은 마인드를 겸비한 김인규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 못지않게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강동희 부회장은 한국체육관 후배 김광선(동국대)도 선수 생활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랑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왜냐면 강 부회장 자신은 김태호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복서로써 꿈과 야망이 연기처럼 사라진 반면 김광선은 복싱 초창기에 숙적 오광수와 허영모에 연패를 당하면서도 뚝심으로 버텨 최후에 웃는자가 되어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88서울 올림픽 금메달 김광선과 강동희 이사장(우측)
88서울 올림픽 금메달 김광선과 강동희 이사장(우측)

김광선은 1983년 로마월드컵 선발전 결승에서 오광수에 사실상 패한 경기를 펼치고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유는 단 하나, 경기 장소가 김광선이 소속된 동국대학 실내체육관 이었기 때문이다.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복싱계 도덕군자로 불리던 김광선의 스승 김진영 선생이 동국대학으로 대회를 유치하면서 이 회심의 카드가 신의 한수가 되어 승패에 결정적인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했다.

극적으로 승리한 김광선은 로마월드컵 본선에서 러시아의 에스피노자를 꺽고 한국 아마 복싱 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금메달을 획득하며 기염을 토했다.

이후 김광선은 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87년 월드컵 금메달,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링을 떠났다. 김광선은 허영모나 오광수에 비해 복싱 스킬이 뛰어난 복서는 이니었다.

하지만 강철처럼 강하고 생고무처럼 질긴 투혼이 집대성되어 높고 험한 올림픽 담장을 무너뜨렸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격언을 실증한 김광선이어서 강동희 회장은 더욱 더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30년 세월을 지켜본 강동희 부회장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닌 복싱인이다.

전 서울복싱협회 김기식 부회장
전 서울복싱협회 김기식 부회장

현재 한국 아마복싱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김광선과 박시헌의 금메달을 끝으로 36년째, 프로복싱은 2006년 지인진이 WBC 페더급 정상에 오른이후 18년째 무관으로 전락하며 최악의 침체기를 겪고 있다.

특히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숫자의 격감은 곧 시장의 축소와 유망주들의 대전 기회 박탈로 연결돼 복싱 저변이 와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 거대한 산을 태우 듯 한국 복싱이 다시 흥하기 위해서는 강동희 실업연맹 부회장과 김기식 신우실업 대표 등 독지가들의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법이다. 복싱인들이여, 이런 난국일수록 대동단결해 복싱 부활을 위해 무엇을 실행해볼까 고민해봅시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조영섭 복싱전문기자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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