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러운 뉴스 하나가 전해졌다. 미 연방정부가 미국 내 10개 지역을 ‘국가기술혁신거점’으로 지정하고 여기에 향후 10년간 16억 달러를 투입하는 ‘기술엔진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뉴스다. 이 중 한 곳이 ‘반도체기술혁신 허브’로 선정된 플로리다다. 플로리다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계획에 따라 반도체 클러스터 ‘네오시티’를 추진한다. 반도체 설계기업인 팹리스 기업과 반도체 패키징 기업을 위한 집적단지 건설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는 한국의 반도체 기업과 대학 그리고 연구소를 유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서글픈 뉴스도 동시에 전해졌다. AI를 연구하는 한국의 대학 연구소들이 전력 부족으로 연구진행이 늦춰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AI는 대량의 전기를 필요로 한다. 챗GPT로 AI 문서 작업을 할 경우 평균 2.9Wh의 전력이 소비된다. 구글 인터넷 검색 시 필요한 0.3Wh 전력의 약 10배다. 문서가 아닌 이미지나 동영상 생성 시에는 문서생성 대비 40~60배의 전력이 필요하다.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는 AI 연구에는 훨씬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한국의 대학들은 이런 양의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궁여지책으로, 서울대에서는 연구실들이 AI 서버를 절반만 돌리고 있다. 고려대는 교내의 AI 서버를 통합해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성균관대는 AI 연구소들이 규약을 맺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전기를 쓰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뉴스는 모두 산업정책과 관련한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고 적극적인 산업진흥책을 쓰고 있다. 한국은 AI의 중요성만 강조했지 이에 필요한 전력 인프라 구축 등의 산업정책으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원래 미국은 산업정책에 관심이 없던 국가다. 시장의 효율성을 믿고, 경제혁신의 주체는 민간이어야 하며,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산업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의 제조업이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뒤처지면서다. 지난 바이든 정부 때가 변곡점이었다.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IIJA, 2021) 제정으로 미국이 산업정책에 뛰어들었음을 알렸다.
도로, 전력망, 광대역 통신망, 전기차 충전시설 구축 등 인프라 투자에 대규모 지원하는 법이다. 반도체 산업에 52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붓는 칩스법(CHIPS, 2022)도 만들어졌다. 전기차, 배터리, 재생에너지 등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2022)도 제정되었다. 트럼프 정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구호하에 관세를 무기로 다른 나라의 기업이 미국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고 있고, 적극적인 화석연료 개발로 값싼 에너지 보급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 국가기술혁신거점 지정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산업정책도 구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어떠한가?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성장한 나라다. 1960년대 최초의 산업정책인 경공업 육성책이 펼쳐졌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수출주도 정책도 전개되었다. 1970년대 산업정책의 핵심은 중화학공업의 육성이었다. 철강공업육성법(1970)과 비철금속제철공업사업법(1971)이 이 시기 제정되었다. 1980년대는 산업 합리화가 화두였다. 방만하게 전개되던 중화학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조기술 경쟁력 강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자동차, 선박, 화학제품, 전기·전자, 기계류 등의 중화학공업 제품들이 수출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1990년대는 정보통신 기술이 산업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반도체, 휴대폰 등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였다. 2000년대는 구조조정이 산업정책의 핵심으로 다시 떠올랐다. 1997년 시작된 IMF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정부는 전자정부를 구축하고 인터넷 시대를 여는 산업정책을 폈다. 이에 더해 벤처기업 육성 정책이 강도 있게 전개되면서, 한국에서도 벤처기업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자유무역협정(FTA) 시대가 열린 것도 이 시기였다.
2010년 이후는 참담하다. 산업정책 실종 시대를 맞는다. 정부마다 구호만 화려했지, 효과 없는 정책들만 나열되었다. 모처럼 마련된 핵심 정책들도 지지부진했다. 한 예가 2018년 발표된 용인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사업이다. 이 사업은 시간만 끌다 3년 후인 2021년이 되어 정식 승인이 났다. 그리고 최초 계획 후 6년이 지난 2024년, 이 사업은 용인, 이천, 평택, 화성, 수원, 판교, 안성 등을 포함하는 메가 벨트사업으로 재포장되었다.
산업정책은 화려한 계획이 핵심이 아니다. 결실을 맺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예산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그러자 핵심기업인 삼성전자가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전기공급문제가 터졌음에도 국가적 대처는 실망스러웠다. 반도체 클러스터에 공급될 전기는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건설과 호남의 태양광발전소 및 동해안 원전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기 생산지와 클러스터 사이에 놓인 지자체들의 반발이었다. 안성시는 전기생산용 LNG 연료 공급관 건설에 반대하였고, 여주시에서는 주민들이 신원주~동용인 송전탑 건설을 막았다. 하남시는 동해안~동서울 송전 선로 건설에 반대했다. 송전선 통과 시 전자파가 주민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는 손을 놓았다. 한전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만 내놓았다. 이러다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이 끝을 볼 수는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사업은 대학 AI 연구소들의 전기부족과도 관계가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로 공급될 송전선을 뚫어 수도권 전기공급량도 늘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산업정책이 실종되고 있는 사이 중국과 일본은 강력한 산업정책을 밀어붙이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움직임도 한국에 위협적이다. 이로 인해 철강이나 석유화학 같은 주력 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반도체나 이차전지와 같은 첨단 산업들은 쫓기고 있다. 신정부가 강력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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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홍은 KAIST를 졸업하고 광운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인사조직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지식경영학회 및 한국중견기업학회 회장을 지냈고, 삼성그룹, 포스코, 한국전력, CJ그룹 등에서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정부혁신관리위원장, 사업재편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현재는 한국이해관계자학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즈니스의 맥', '세종에게 창조습관을 묻다', '국가경쟁력, 중견기업에서 답을 찾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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