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비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미래의 먹거리 산업을 선택하고 육성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여러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수록 좋다. 이런 것을 ‘산업의 쌀’이라고 한다. 한국은 그간 산업의 쌀을 기가 막히게 육성해왔다. 1967년 가진 것이라고는 가난뿐이던 한국은 포항을 종합제철 입지로 정하며 철강산업을 일으켰다. 쇠가 생산되자 한국에 자동차, 기계, 조선, 건설 산업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반도체도 유사하다.

사실 이 산업은 국가 비전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반도체의 시작은 1968년 아남반도체였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반도체가 핵심산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합병한 후 1982년 반도체연구소를 세우면서다. 같은 해 정부와 기업이 중심이 돼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이 땅에 반도체 역사가 시작되었다.

1996년 한국은 새로운 산업의 쌀에 주목하였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 하에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을 수립하며 초고속 통신망 시대를 열었다. 이후 한국은 3G, 4G, 5G 통신망 구축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고 글로벌 인터넷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것을 바탕으로 네이버, 카카오가 태어났고 갤럭시 시리즈로 스마트 폰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 

미래는 무엇이 산업의 쌀이 될까? 반도체는 여전히 이 역할을 할 것이다. 미래는 AI가 결정짓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의 핵심기술이 반도체라는 것도 상식이다. AI의 학습과 추론에 필수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신경처리장치(NPU)와 이들을 뒷받침하는 메모리가 모두 반도체다. 반도체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래는 로봇이 지배한다. 로봇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려면 센서, 제어, 네트워크 작업이 고도화돼야 한다. 여기에 필수가 반도체다. 미래의 TV 역시 AI가 핵심이다. AI를 활용한 화질 최적화, 음성 인식, 고도의 사물인터넷(IoT) 기능이 탑재되려면 고성능 반도체가 필요하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도 마찬가지다. 국방·우주 산업에서도 반도체는 필수적이다. 미사일, 전투기, 위성 시스템은 정밀 반도체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의 F-35 전투기 1대에는 500개 이상의 고급 반도체 칩이 들어간다. 

불행히도 이 산업이 한국에서 푸대접받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의 육성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메모리마저 중국에 쫓기면서 이 산업조차도 흔들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반도체 기업에 무슨 정부 지원이냐는 불필요한 논쟁을 한국은 하고 있다.

이 여파로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 않다. 미국, 중국, 일본이 정부 돈을 무한정 쏟아가며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려 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유가 뭘까? 국가 비전이 없어서다. 

놀랍게도 한국에는 반도체만큼 중요한 산업의 쌀이 스스로 태어났다. 이차전지다. 미래는 이차전지가 움직인다. 우선, 이 기술이 없으면 전기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전기차의 경쟁력은 배터리 성능에 의해 좌우된다. 이차전지는 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도 핵심기술이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만들어진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려면 이차전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차전지의 참모습은 휴머노이드 로봇에서 나타난다.

이것의 핵심기술은 세 가지다. 하나는 AI 지능이다. 사물과 주위를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기술이다. 다음이 관절기술(Actuator)이다. 팔이나 손 다리의 관절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이다. 세 번째는 이차전지 즉, 배터리 기술이다. 

중국이 휴머노이드 로봇이 투입되는 마라톤 경기를 벌였다. 21㎞의 거리를 2시간 40분 42초 만에 뛴 텐궁이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3번의 배터리 교체가 있었다. 53분마다 교체된 셈이다. 이런 휴머노이드 로봇은 아무 짝에 쓸모없다. 1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배터리가 장착된 휴머노이드 로봇은 실무현장에서는 경쟁력이 없다. 최소 4시간, 이상적으로는 8시간을 버텨야 한다. 다행인 것은 이차전지에서 한국은 글로벌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중국이 이 산업의 진가를 알아보고 집중 투자를 하면서 한국을 밀어내고 있어서다.

미국도 이차전지 산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이차전지 기업을 미국에 보조금까지 주며 유치하려 하고 있다. 이들에 비해 한국은 한가하다. 2023년 7월 이차전지 특화단지를 지정한 후 공장설립을 지원했지만, 이후의 대책은 화끈하지 못하다. 전기자동차 캐즘으로 이차전지 업계가 위기에 빠지자 그제야 2025년 1월 ’이차전지 비상대책 TF’를 꾸렸다. 애초 이차전지가 국가 비전에 없었다는 증거다. 이차전지는 그저 발전시켜야 할 여러 산업 중 하나로 보았을 뿐이다. 그 사이 시가총액 10조원이 넘던 기업이 나자빠졌다. 또 다른 거대 기업들이 흔들거리고 있다.  

반도체와 이차전지는 미래에도 위력적이다. 한국이 조선산업에서 생존하려면 현재의 LNG선 건조를 넘어 자율운항 선박 건조력을 키워야 한다. AI 기반 인공지능은 자율 항해, 장애물 회피, 경로 최적화의 필수기술이다. 당연히 반도체가 핵심이다. 여기에 배터리 추진 시스템이 적용되면 조선과 해운업계는 새로운 항해 시대를 맞게 된다. 군사용 잠수함도 반도체와 이차전지가 핵심기술이다.

AI 기반 고신뢰 자율항법 칩셋과 자율 물체 인식 및 경로 예측 칩이 있어야 하고 이들을 통합 관리하는 제어력이 필요하다. 모두 반도체가 하는 일이다. 이차전지도 중요하다. 배터리 구동형 잠수함은 소리가 없다. 이는 적에게 치명적이다. 이차전지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위력적이다. 미래에 보일 비행자동차(flying car), 로봇 기반 무기, 드론이 모두 고급 이차전지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한국은 미래 산업의 쌀인 반도체와 이차전지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다. 새로운 미래 기술을 찾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 산업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이들 산업을 단순히 세금 많이 내는 뚱뚱한 하마 정도로 생각하지 말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산업으로 인식해야 한다. 차기 정부는 이런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한국이 미래에도 강건하게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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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홍은 KAIST를 졸업하고 광운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인사조직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지식경영학회 및 한국중견기업학회 회장을 지냈고, 삼성그룹, 포스코, 한국전력, CJ그룹 등에서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정부혁신관리위원장, 사업재편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현재는 한국이해관계자학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즈니스의 맥', '세종에게 창조습관을 묻다', '국가경쟁력, 중견기업에서 답을 찾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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