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長袖善舞 多錢善賈)”
무슨 일이든 조건이 나은 사람이 큰 성과를 거둔다는 비유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온다. 날로 힘이 세지고 잘사는 강대국은 모략을 꾸며도 성공하기 쉽지만, 점점 힘이 빠지고 사회가 혼란한 나라에선 계책을 세우는 일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다는 내용을 중국 전국시대 대표적 법가 한비가 빗대 말한 것이다.
자유무역 종언과 미·중 패권다툼
처음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秦)나라에선 책사가 열 번 바뀌어도 목적한 바를 잃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연(燕)나라는 한 번 바꾸어도 계책대로 이루지 못했다. 연은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은 탓이다.
주요 2개국(G2)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 사상 최대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초강대국 간 패권 대결이다. ‘하늘 아래 태양은 하나’라는 자존감의 발로다. 세계 경제의 성장·침체와 더불어 패권국의 성쇠가 반복되는 것이기에 ‘영원한 패권제국’은 없다는 게 고금동서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미 중화민족의 부흥인 ‘중국몽(中國夢)’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패권국을 꿈꿀수록, 미국은 고삐를 더 강하게 조인다는 점이다. 용호상박(龍虎相搏), 용과 호랑이 싸움 같은 미·중 패권다툼이다.
국제무역 질서가 대변혁을 맞고 있다. 미국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USTR) 대표는 30년을 이어온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종식을 최근 선언했다. 현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30년을 이어온 WTO 체제 등 80년의 자유무역 질서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취임 불과 200일 만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트럼프 라운드의 핵심은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이라는 수단과 목표로 채워져 있다. 사실상의 유일한 수단으로 무차별적 관세를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식 관세 정책은 세계 각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트럼프의 관세는 유럽과 다른 교역 상대국들의 보복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무역(관세 철폐‧비차별주의‧다자 규범 기반)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향후 세계 무역질서는 전면적인 자유무역으로 회귀하는 대신, 대안적 구조로 이행될 가능성이 높아 우리도 선제적 대응이 긴요하다.지역 중심의 블록 무역 체제 강화 움직임이 주목된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미국이 빠진 TPP를 계승한 형태로서 일본·호주·캐나다 등 11개국이 가입했고, 최근 영국이 신규 가입했으며, 한국도 가입을 검토 중이다.
지역 블록체제·양자 협정 강화 움직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는 한국·중국·일본·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15개국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 블록으로 관세 장벽은 낮지만, 규범 수준도 낮다. 한·중·일 FTA는 한국·일본·중국 3국이 조기 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재개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의 교역 악화에 대비한 아시아 블록 통합 전략으로 해석된다.
양자 협정(1대 1 협상) 중심의 관리형 무역도 큰 흐름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다자협정보다 양자협정을 선호하며, 무역 흑자·적자 등 특정 지표에 따른 ‘관리형 무역’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이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의 일정량 수입, 자동차 안전기준 완화, 미국산 농산물 구매 확대 등을 약속하면 미국이 한국에 대한 상호 관세율을 낮춰주는 구조다.
우방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프렌드 쇼어링)도 전망된다. 미국은 안보 동맹국과 전략적 파트너국에 대해 우호적 관세 정책을 취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주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향후 글로벌 공급망이 ‘우방국 중심(친미)’과 ‘비 우방국 중심(중국·러시아)’으로 양분될 가능성을 시사한다.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이 무려 98.6%이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은 35.7%에 이를 정도다. 따라서 이재명정부는 핵심 수출 산업에 대한 미국의 관세 부과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외교적으론 유연성을 발휘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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