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S2A 개인전
‘그릴 수 없기에 더욱 존재하는 세계'환기

나름의 ‘그림 이론’을 펼쳐오고 있는 정수진 작가의 개인전 ‘부도위도(不圖為圖)’가 11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S2A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난 수년간 이어온 회화적 탐구를 새로운 단계로 확장하는 자리로, 신작 유화 18점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 ‘부도위도’는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린다’는 뜻이다. 정수진은 현실에서 보이는 형상을 재현하기보다 자신만의 색형(色形) 체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의식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즉,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 생각, 무의식, 리듬, 균형 같은 것들을 그림안에서 연구하고 표현한다.

“정수진의 회화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출발한다. 그가 말하는 ‘현실계’는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세계이며, ‘형상계’는 그 현실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과 차원을 뜻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 두 세계가 맞닿고 스치는 순간, 즉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계의 틈에서 태어난다. 그의 그림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형태를 잃고, 사물의 리듬 속으로 흩어지는 과정에 가깝다. 반복되는 병의 형태, 겹쳐지는 이미지, 번져나가는 색채 속에서 감정은 점차 이름을 잃는다. 그러나 그 자리는 결코 차갑거나 공허하지 않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의식의 잔향, 미세한 진동이 화면 전체를 감싸며 보는 이의 내면을 흔든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말하는 ‘부도위도(不圖為圖)’ ―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린다” ― 로 이어지는데, 이는 단순히 비워두는 행위나 공백의 미학이 아니다. 오히려 그릴 수 없기에 더욱 존재하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선명한 세계에 대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S2A 디렉터 강희경)

정수진이 말하는 ‘형상계’는 감정이 잠시 머무는 장소이자, 사물과 인간의 의식이 얽혀 있는 그물망이며, 그의 화면 속 ‘감정의 시간’은 폭발처럼 터져 나오기보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잔잔히 드러난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 “예술은 감정의 순간이 아니라,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의식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정수진의 회화는 바로 그 흔적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천천히 통과하며 자신 안의 의식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회화는 조용히 묻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시간 속에서 가능한가. 그 물음은 곧, 우리가 ‘본다’는 행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지각적, 인식론적 과정을 거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작품을 비평하는 나와 같은 이에게 그림이나 이미지는 텍스트로 읽혀진다. 읽히지 않는 글귀도 나에게는 하나의 텍스트이며, 우리가 일차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형상이나 이미지들도 나에게는 수만 가지의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내가 히랍어를 모르고 중동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게 텍스트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내 인식의 구조에서 그것들은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상형문자는 유 럽인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형상이자 그림이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이미지의 의미나 존재가 소통되지 않거나 번역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의 그물망에서 그 이미지가 내가 아는 ‘의미’로 번역되지 않을 뿐이다. 정수진의 형상들은 우리의 인식의 체계와 사물의 질서 안에서,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포섭되지 못한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긴 여정이 되어 왔다.”(정연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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